통일 신라의 의식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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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통일 신라의 의생활

통일 신라의 식생활

통일 신라의 주거생활

본문내용

지붕 위에 얹어 놓는 동물모양 조각품)을 만들어 놓지 않으며, 비첨·겹들보 회두아(기둥 위에 가설방목)·현어를 하지 않고, 금은·놋쇠 돌·구리·납과 5색 무늬로 장식하지 않는다. 계단석을 갈지 않고, 담장은 높이 7자를 넘지 못하며 보를 가설하지 않고, 석회를 바르지 않는다. 염연은 금계릉견시를 금하고, 큰문과 사방문을 내지 않으며, 마구는 3필을 둘 만하게 한다.]
[4두품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는 방의 길이와 너비는 15자를 넘지 못하며, 山楡木(산유목)을 쓰지 않고, 조정(수초를 그린 천정)을 하지 않으며, 중국 기와를 덮지 않고, 수두·비첨·공아·현어를 만들지 않으며, 금은·놋쇠·돌·구리·납으로 장식하지 않는다. 섬돌은 山石(산석)을 쓰지 않고, 담장은 6자를 넘지 못하며, 또 (잠의) 보를 가설하지 않고, 석회로 바르지 않는다. 큰문과 사방문을 만들지 않고, 마구는 2필을 둘 만하게 한다.]
[지방의 眞村主(진촌주)는 5두품과 같고, 次村主(차촌주)는 4두품과 같다.](삼국사기)
신라 초기에는 이러한 계급간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계층간 구별이 구체화되었다고 생각된다. 방의 넓이나 담장의 높이 지붕과 처마, 방의 장식, 계단의 구조에 차이를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단층으로 축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한옥의 구조로 볼 때 이러한 차이야 말로 가옥의 규모와 마당으로부터의 마루까지의 높이 등이 절로 규정되어 계급 사이에 확연한 구별이 가능해졌을 것이다.
"삼국사기"옥사조에 이 시대의 옥사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기술되어 이것을 연구하므로써 주택의 규모, 사용된 건축장식 및 구조 등을 추정 할 수 있다. 기록에 있듯이 왕경에서는 집들이 매우 화려하여 기와집이 즐비하였으며 숯으로 밥을 지었고 가무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하였고 지나친 사치를 막기 위하여 계급별로 규제를 하였다. 이 내용으로 보아 당시의 주택들이 얼마나 화려했는지 가히 짐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왕경도심의 형편이었을 뿐 시골의 경우는 달랐을 것이다.
<집모양의 토기> <보상 당초무늬 벽돌>
<참고 문헌>
·「한국사의 이해」,윤경호 저, 2001년, 느티나무 출판사
·한국의 전통 초가 윤원태 도서출판 재원 1998
·http://www.axisoft.co.kr 한국전통가옥
·http://www.thingskorean.com 옷의 역사
·http://www.koreafoods.net 전통향토음식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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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6.01.06
  • 저작시기2006.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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