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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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머리말

Ⅱ.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생애와 저술

Ⅲ.퇴계 이황의 주요활동
1.학문과 수양법
2.교육
3.정치

Ⅳ.퇴계 이황의 사상
1.양명학 비판론과 거경궁리의 방법론
2.이기론(理氣論)
3. 심성론과 사단칠정 논쟁
4.경(敬)의 윤리

Ⅴ.맺음말

본문내용

의 주체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경은 이를 체득하고 진정한 앎을 탐구하는 학문의 방법으로 이해된다. 이황은 학문의 방법으로 거경과 궁리를 제시하였는데 경은 진리 인식에 이르는 길이며 이의 체득 방법으로 중시하였다.
셋째, 경은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는 방법으로 제시된다. 이황은 경으로 안을 바르게 하는 것이 일용의 첫째라 하고 고요해서는 천리의 본연을 함양하고 움직여서는 인욕의 기미를 결단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천리와 인욕의 판별은 한 마음의 주재인 경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경은 한 마음의 주재로서 진리 인식의 방법이고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막는 수양의 첩경이다. 경은 이황의 성리학에 있어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Ⅴ.맺음말
이황은 사대사화의 시대에 살았다 그의 나이 4세에 갑자사화가, 19세에 기묘사화가, 45세에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거의 반세기에 걸친 사화시대에 수많은 사림들의 희생을 가져왔으며 인륜 질서의 파괴를 초래하였다. 불의가 정의를 짓밟고 패도(覇道)가 왕도를 자처하고 소인배가 군자를 내쫓고 국정을 전횡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을사사화 때 넷째 형 이해의 희생을 직접 겪어야 했다. 이러한 불의의 시대에 이황은 나아가 직접 정치 현실을 광정하기보다는 물러서서 학문과 교육을 통해 그 시대의 전도된 가치 질서를 바로잡고자 하였다.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을 통해 이황은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먼저 이황은 교육자로서 교육개선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황이 살았던 시대에는 네 차례에 걸친 사화와 외척과 훈구 세력의 권력 다툼으로 매우 혼란하였으며 이는 지방의 향교, 사학, 한양의 성균관 등의 관학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화를 당한 학자들은 은퇴하여 벼슬을 하지 않았고 관학에서 강의 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과거 합격을 위해서 관학에서의 수학보다는 어떤 인맥이 있는냐가 더 중요하였으며, 과거시험도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쳐 있어 역사나 유교철학보다는 사장을 더 강조하였다. 이러한 잘못된 교육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하여 이황은 관직에서 은퇴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서원건립에 힘써서 서원의 기초를 마련하여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도덕적 인간교육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학식의 얕고 깊음에 따라서 교육하여 획일적인 교육을 배척하여 개성을 존중하였다. 이러한 도덕적이고 개성적인 교육관은 현대의 교육관을 반성하게 한다. 대학입시만을 위한 교육으로 바뀌어가면서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현재 교육제도는 이황이 살았던 시대와 무관하지 않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그의 교육관은 본받을 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백운동서원을 사액 서원으로 만들어 우리나라 사액 서원의 효시를 이루게 하였다. 이후 조선의 유학이 수많은 서원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그 중에서도 사액서원이 일반 서원들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이황의 백운동서원의 사액 서원하는 커다란 업적을 남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황은 공직자로서 깨끗한 청백리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사대사화로 인해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에서도 맡은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공직자로서 자질이 없고 충분히 수양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직에 오르는 것이 옳지 않다며 은퇴하여 학문 연구와 인재양성에 몰두 하였다. 이러한 이황의 생각은 자신이 정신과 육체로부터 안정되어 더욱 발전된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직에 있을 때는 물론이고 교육자로서나 학자로서도 이황은 매우 성실하고 진지한 인간의 참모습을 끊임없이 보여 주었다. 이러한 그의 참다운 인간상은 위기지학으로서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고매한 인격의 승화된 기품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황은 사상가로서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서 당시 사회 질서, 체제를 합리화하였다. 이는 12~13세기부터 수입되기 시작한 성리학이 16세기 이황에 이르러 심성설을 중심으로 좀더 깊은 형이상학화의 작업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수용됨으로써 한국화하여 간 것이다. 이황이 살던 시기는 고려 말 조선 초에 행하였던 [주자가례]나 [삼강행실도]등의 보급 장려만으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없었다. 당시 질서, 체제에 대한 좀더 깊은 근거로서의 이론을 필요로 하였고 이황의 이론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독자적으로 부응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황의 사상적 특징은 양명학을 배척하고 주자학의 입장을 취하며, 주리적 이기이원론의 철학을 견지하면서 사단칠정과 같은 심성론의 이론적 탐구를 병행하는 주지주의적 경향이 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한국 성리학의 특색이기도 하다. 이황 이후 중국과는 달리 한국에서 양명학은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기에 치중하는 철학은 이미 서경덕에서부터 두드러졌는데 이에 치중하는 철학은 이언적에서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하였지만 이러한 경향들이 각기 주기론, 주리론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이황의 사단칠정론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중의 주리론은 이황으로 사림의 철학이 되어 정통철학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즉, 사단칠정론을 둘러싸고 퇴계학파, 율곡학파나 주리파, 주기파 또는 영남학파, 기호학파라는 학파의 형성을 가져온 사실 자체가 조선의 성리학이 이황의 사상을 계기로 본격적인 한국화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이 더욱 더 강한 독자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이황의 사상은 한국의 성리학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신귀현, [퇴계 이황-예 잇고 뒤를 열어 고금을 꿰뚫으셨소.], 예문서원, 2001
유명종, [퇴계의 일생과 철학체계], 현대미학사, 2000
정순목, [退溪評傳], 지식산업사, 1989
금장태, [퇴계의 삶과 철학], 서울대출판부, 1998
다카하시 도오루 지음, 조남호 옮김, [조선의 유학], 소나무, 1999
조준하 외, [한국인물유학사 2], 한길사, 1996
황의동, [한국유학사상], 서광사, 1995
국제퇴계학회 http://www.toegye.n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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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1.09
  • 저작시기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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