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삼국유사]연오랑과 세오녀, 내물왕과 박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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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사기&삼국유사]연오랑과 세오녀, 내물왕과 박제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연오랑과 세오녀
1.삼국유사의 내용과 그 시대를 통치한 아달라이사금의 삼국사기 기록
2.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에서 주목해야 할 점

내물왕과 박제상
1.삼국유사, 삼국사기의 기록

본문내용

그 점을 헤아려 주소서!"
장수왕은 그 말을 듣고 쾌히 복호를 데리고 돌아갈 것을 허락했다.
<이 부분에 대해 삼국유사는 제상이 변장을 하고 고구려에 잠입하여 복호를 빼돌렸고 고구려의 추격병이 복호를 불쌍히 여겨 놓아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 정황으로 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만약 신라에서 복호를 몰래 빼돌렸다면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했을 것이지만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또 삼국유사는 425년에 제상을 고구려에 보냈다고 했는데 삼국사기엔 418년 정월에 복호가 돌아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 정황으로 봐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옳게 보고있다.>
제상이 복호를 데리고 귀환하자, 눌지왕은 즐거워하며 제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두 아우를 좌우로 두 팔처럼 여기는데, 이제 겨우 한 팔만 찾았으니, 나머지 팔은 어이할꼬?"
제상은 기꺼이 눌지왕의 염치없는 부탁을 들어주며 한가지 계책을 내놓았다.
"고구려는 대국이고 왕도 어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이 한마디 말로써 그를 깨우칠 수 있었지만, 왜인들은 말로써 달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임수를 써야만 합니다, 신이 왜로 가거든, 대왕께서는 신에게 반역의 죄를 씌우고, 그 소식이 저들의 귀에 들어가게 하소서."
그런 계책을 남기고 왜로 떠난 제상은 이미 죽기를 각오하고 가족들도 만나지 않고 곧장 배에 올랐다.
그 소식을 듣고 그의 아내가 포구로 달려왔지만 이미 제상이 탄 배는 출발한 뒤였다. 그녀는 남편을 실은 배를 바라보면서 대성통곡을 하면서 잘다녀오기를 외쳤지만
제상은
"나는 명을 받들고 적국으로 가는 길이니, 그대는 다시 만날 것을 기대하지 마시오."
라는 대답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그 길로 왜국에 들어간 제상은 계획대로 자신이 모반을 도모하다 도망쳐 온 것으로 꾸며댔지만 왜 왕은 그의 말을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러다 제상과 미사흔의 가족이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제상의 말을 믿었다.
왜 왕의 신뢰를 얻은 제상은 미사흔과 배를 타고 놀며 낚시를 즐기고 사냥을 다녔다. 그런 모습을 본 왜인들은 제상이 전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왜인들이 더 이상 의심의 눈초리를 품지 않자 제상은 미사흔에게 본국으로 도망할 것을 권했다. 때마침 안개가 짙게 내려앉아 도망치기 좋던터라 미사흔은 도망하기로 마음먹고 제상에게 함께 떠날 것을 권했다.
"내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있는데, 어찌 나 혼자 가겠소이까?"
그러나 제상이 단호하게 말했다.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난다면 일을 성사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혼자 떠나셔야 합니다."
결국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안고 울면서 하직 인사를 하고 떠났다.
미사흔이 떠난 뒤 제상은 미사흔의 방 안에서 혼자 자다가 다음날 늦게 일어났다. 제상이 늦게까지 나오지 않고 잠을 자자 왜인들이 밖에서 물었다.
"장군은 왜 이렇게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으시오?"
제상이 대답하길
"전날 배를 너무 많이 탔더니 피곤하여 일어날 수가 없었소."
왜인들이 이상히 여겨 미사흔이 방안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방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제상이 그들을 만류하며 왕자가 피곤하니 깨우지 말라 하였다.
저녁무렵이 되어서 왜인들이 다시 미사흔을 찾자 제상이 웃으며 왕자가 이미 떠난지 오래다 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왜인들이 제상을 결박하고 배를 풀어 미사흔을 추격했으나 안개가 짙게 끼어 쉽사리 추격할 수 없었다 덕분에 미사흔은 무사히 신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박제상의 활약으로 두 아우를 무사히 찾은 눌지왕은 크게 잔치를 베풀고 노래를 지어 불렀으니 그 노래가 "우식곡(憂息曲)" 이다.
미사흔을 놓친 왜왕이 분개하여 제상을 추궁하며 어찌하여 미사흔을 몰래 빼돌렸냐고 묻자 제상이 담담한 얼굴로 대답하길
"나는 신라의 신하이지 왜의 신하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그 말에 분노한 왜 왕은 제상을 목도로 유배시켰다가 마침내 불에 태워 죽였다.
그러자 부사로 갔던 김철복이 그의 말을 끌고 가서 의복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이 사실을 혈서로 써 말의 입에 물리고 채찍을 쳐 바다로 쫓고 자결하였다. 말이 신라로 돌아와 궁궐 앞에 이르러 혈서를 토하고 죽으니 왕이 그 혈서를 읽고 크게 슬퍼하며 대아찬에 추증하고 양산에 비를 세워 충절을 기렸다.
또 일본의 <유방원사적>에는 "그가 죽던 날 그를 태워 죽인 불길이 하늘로 치솟아 청천벽력으로 화해 왜왕을 기절 초풍케 하였고 그를 태워 죽인 군졸들은 모두 피를 토하고 죽었으며 그 이듬해 신라를 치려고 바다를 건너갔던 군사들은 풍랑을 만나 몰살 당하여 다시는 신라를 칠 엄두를 못 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부인 김씨는 남편이 고구려에서 돌아오자마자 다시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첫째딸과 셋째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마침내 미사흔만 돌아오고 남편은 순절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두 딸과 함께 자진하니 몸은 화해서 망부석이 되고 넋은 치술조로 화하여 목도까지 날아가 남편의 넋을 맞아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어느 날 왕이 있는 진정 마루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아 구슬픈 소리로 지저귀며 "목도의 넋을 맞아 고국에 돌아오니 뉘라서 그것을 알리요" 라는 뜻의 글자를 쪼아 놓고 날아 가자 왕이 이상히 여겨 뒤쫓아가보게 하였던 바 치술암 기슭의 바위 속으로 들어갔다. 왕은 비로소 그 새가 김씨 부인의 넋임을 알고 그 바위를 은을암이라 하고, 그 바위 위에 영신사를 세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차녀 아영은 가정을 위해 살아서 다섯 살 된 남동생을 기르니 이 아이가 바로 백결선생이다. 눌지왕이 듣고 미사흔으로 하여금 아영을 아내로 삼게 하고 위로하였다.
이러한 박제상의 충절에 대해 조선의 세종대왕은 "신라 천년에 으뜸가는 충신이다" 하였고 정조는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은 만세에 걸친다" 고 높였으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충절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참고문헌
김부식저, 이병도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1996
석일연저, 권상노역 <삼국유사> 삼원사.1995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신라 왕조실록> 웅진닷컴.2001
박진태외 <삼국유사의 종합적 연구> 도서출판 박이정
홍하상 <진짜일본 가짜일본> 비전코리아
  • 가격2,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6.01.16
  • 저작시기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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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3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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