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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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후쿠자와 유키치 개인사

2. 시대적 상황

3.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적 기반

4.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적 변화(1881년을 기점으로)

5. 후쿠자와 유키치의 대내외적인 영향과 활동

6. 쟁점- 근대화의 주도자인가? 제국주의의 대변자인가?

7. 현 시대에의 적용

8.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즈미 정부의 움직임은 마치 이를 교본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에선 야스쿠니신사 참배 강행, 교과서 왜곡 등으로 철저히 이웃 나라를 무시하고, 다른 한쪽에선 미국을 방패막이 삼아 대외 팽창을 꾀하는 행각이 영락없는 ‘탈아론’의 재판이다. ‘탈아론’ 10년 후 일본은 청-일 전쟁의 승리로 기세를 올렸고, 20년 후엔 을사조약을 통해 조선 침탈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브레이크 없는 팽창주의는 결국 70년 뒤 패망으로 이어졌다. ‘문명의 충돌 저자’ 새뮤얼 헌팅턴은 20세기 국제정치에서 보여준 일본식 생존법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한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패권국으로 생각되는 쪽과 편을 짜 안전을 지켜왔다. 20세기 초에는 영-일 동맹이, 1930년대엔 독일과의 추축국 형성이, 50년대엔 미-일 동맹이 그 수단이었다.” 그의 분석대로라면 미국의 패권이 지속되는 한 일본은 후원자를 바꾸지 않으려 할 것이다. 이렇게 역사의 흐름마다 일본은 아시아의 국가로 남으려기 보다는 아시아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런 일본의 의식의 가장 깊숙한 곳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이 살아있다. 탈아론의 재판으로 보이는, 강화되는 美日동맹은 중국을 압박하면서 한국에게도 어려운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브래드 그로서만 퍼시픽 포럼 연구실장은 “한국 일본 중국 3개국 정부가 자국 국민들만을 의식하고 행동하면서 그 같은 행동이 국제 사회에 미칠 여파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로서만 실장은 “일본 정부는 우파를 만족시키려 하고, 한국 정부는 진보 진영을 겨냥하고 있으며 중국 정부는 일반 대중의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탈출구를 찾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동북아 3국이 20세기 유럽의 강대국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지위를 상승시키고 자신이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노력의 일환들은 동북아의 정세를 불안케 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과 한국이 후쿠자와가 탈아론에서 주장했던 것처럼 동방의 악우인지 진정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대 교역국으로 떠오른 중국과, 미국에 이어 세 번째 교역국인 한국과의 갈등은 일본에 갈수록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고민을 던져줄 것이다. 오랜 불황으로 무기력에 빠져 있는 일본에 새 활력은 필요하지만, 후쿠자와식 팽창주의는 아무리 봐도 위험한 외줄타기다. 100년 전에 비해 지금의 동아시아 사정은 그만큼 많이 달라져 있다. 일본인들은 지금의 일본을 가깝지만 먼 나라로 만들었던 탈아론이 가져온 역사적 교훈들에 대해서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일본, 미국, 중국, 대만 등의 국가들의 이해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끊임없이 이들 행위자를 자세히 관찰하고 기민하게 움직여야할 것이다.
8. 결론
결론적으로 후쿠자와 유키치는 첫째,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일본과 동아시아에 그것을 현실화했다는 점, 둘째, 조선의 개화파 등 동아시아의 개화인사들에게 문명개화에 대한 필요성을 각인시킨 점, 셋째, 일본이 이룩한 근대화에의 성공은 동아시아의 근대화의 모델로 여겨질 수 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근대화의 주도자로서의 위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에 대한 이중적 잣대를 보여준 그의 문명개화는 일본제국주의를 위한 수단적 의미를 지녔다는 점, 유럽열강질서에의 편입을 주장했던 그가 유럽이 아시아를 정복의 대상으로 보았던 것같이 조선과 청을 정복과 교화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한국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조선정략론은 조선의 이익보다 일본의 이익과 안보을 추구, 조선 근대화의 특수성을 무시, 동아시아에서의 패권확보를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은 일본 제국주의의 대변자의 모습을 생각하게 한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개화의 경우, ‘타’와 ‘자’에 대한 구분의 의미가 존재했고 그것은 ‘탈아론’과 같은 제국주의적 모습으로 나아갈 함의를 지녔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며 그러나 19세기의 상황과 서구열강의 침탈 가운데 이러한 ‘타’와 ‘자’의 구분을 넘어 동아시아에 대한 공동체적 인식을 갖는 것이 시대적 상황과 관련하여 가능했을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이와 함께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과 현 시대 일본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2월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4월 6일의 우익 교과서의 승인, 그리고 2월 20일 열렸던 미국과 일본의 '2+2' 회담의 모습과 연관하여 미국이라는 패권을 통해 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일본의 모습에 그의 ‘탈아론’의 사상이 들어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번영시킬 여유는 없다. 오히려 그 대오에서 벗어나 서양 문명국과 진퇴를 같이하여, 중국과 조선을 접해야 한다. 이웃 나라라고 해서 사정을 봐줄 수 없다.‘ 라는 그의 주장은 현재 일본의 의식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이 살아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하게 한다.
<<참고문헌>>
정일성, <<후쿠자와 유키치, 어떻게 탈아론을 펼쳤는가>>, 지식산업사, 2001
가와무라 신지, <<1만엔 지폐 속에 살아 숨쉬는 후쿠자와 유키치>>, 다락원, 2002
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을 권함>>, 일송미디어, 2000
황호철, ‘후쿠자와 유키치의 과학.기술 교육론 고찰 - 흑선 페리의 출현으로부터 러.일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내기까지’, 한국문명학회, <<문명연지>>, 제 5권 제 3호, 2004
미원겸, ‘일본에서의 문명개화론: 후쿠자와 유키치와 나카에 쵸민을 중심으로’,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동양정치사상사>>, 제 2편 2호, 2003
고성행일, ‘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치평론에 나타난 조선정략론’,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한국정치연구>>, 제 13집 제 1호, 2004
네이버 인물 검색 사전, http://www.naver.com
<<목 차>>
1.후쿠자와 유키치 개인사
2. 시대적 상황
3.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적 기반
4.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적 변화(1881년을 기점으로)
5. 후쿠자와 유키치의 대내외적인 영향과 활동
6. 쟁점- 근대화의 주도자인가? 제국주의의 대변자인가?
7. 현 시대에의 적용
8.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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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3.07
  • 저작시기2006.0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3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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