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내재적 발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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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제국의 내재적 발전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내재적 발전론 측면에서 ‘고종은 개명군주였다’는 명제에 대한 논증
1. 고종에 대한 재조명이 갖는 의의
2. 대한제국은 근대를 지향한 절대주의 국가이다
(1) 대한국국제의 반포와 절대국가의 성립
(2) 전환기 국가로서의 대한제국
3. 민국이념의 계승․발전
4. 고종의 대외인식과 대응

Ⅲ. 내재적발전론 측면에서 대한제국 재정운영에 관한 논증
1. 대한제국의 근대적 재정 제도
2. 근대적 경제 성장 여건 충족여부
3. 근대적 경제성장의 지표
4. ‘왕정 부패’설의 진상

Ⅳ. 내재적 발전론 측면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
1. 근대화의 개념
2. 한국근대화의 특수성
3. 대한제국의 자주적 근대화 노력
(1) 철도개발
(2) 황성만들기-서울의 도시개조사업

Ⅴ. 마치며

參考文獻

본문내용

정거장에 연결이 되어 전국으로 이어지는 의미를 담았다. 또한 신도로를 개설하여 배산임수형을 취했던 기존 궁의 배치를 벗어나, 새 사업에서는 궁을 도심 한가운데에 두고 방사상 도로 체계의 기점이 되도록 하였다. 워싱턴DC의 방사상 도로 체계는 백악관과 의회를 각각 기준 건물로 하고 있지만, 서울의 방사상 도로 체계는 당시 새로 짓는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을 그 기준 건물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이태진,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147~151면.
탑골공원도 도시개조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이 공원자리에는 원래 원각사가 있던 곳으로, 조선후기에는 도심의 인구밀집으로 주위가 완전히 집으로 둘러싸여 버렸다. 개조사업의 진행으로 거주민들에게 보상금과 이주비를 주고 철거한 다음 공원 만들기 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공원 내에 야외음악당 시설도 건설하였으나, 강제병합 후 총독부에서 이 음악당을 일본식 건물로 바꾸어 버렸다. 이태진,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158~159면.
이 외에도 당시 진행된 사업으로는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도로 및 하천(개천)을 정비하기 위해 기존도로를 정비했고, 개천 우물을 정비했다. 둘째, 새로운 중심 건축물 축조를 위해 독립문과 원구단, 고종황제즉위 40주년 기념비전을 세웠다. 셋째, 새로운 공원 조성으로 탑골 공원 외에도 독립공원과 경운궁 퍼블릭 파크가 있었다. 넷째, 새로운 문명 시설 도입으로 전기, 수도, 전차가 도입되었다. 특히 전차는 일본 동경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365면.
1896년에 시작된 서울 도시개조사업은 이상에서 살핀 것과 같이 한두 해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1897년 10월 12일에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군주가 황제로 즉위할 무렵 기본 골격은 갖추었으나 그 후에도 추가사업이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근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계속되었다. 서울 개조사업은 그간 부당하게 받아온 청나라·일본으로부터의 강압으로 벗어나 명실상부한 독립국으로 새로 출범하는 마당에서 나라의 얼굴을 가다듬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명실상부한 독립국으로 새로 출범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여 수도를 정비하는 것이 이 계획의 기본 의도였지만, 후에 일제 통감부와 총독부의 파괴공작 속에 대한제국의 도시개조사업을 비롯한 근대화 노력의 모습은 잊혀지게 되었다. 1912년에 공개된 통감부의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노선도’는 남산이 통감부 앞 쪽을 중심으로 방사상 도로망을 새로 계획하여 경운궁 앞의 기존의 방사상 도로체계의 비중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총독부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빌미로 한 경복궁에 대한 훼손을 일차로 진행한 다음, 경운궁 일대의 구조를 변경시키는 작업을 3·1운동 직후인 1919년 6월 25일에 작성한 ‘경성시구개수예정계획선도’에 의해 추진하였다. 이는 3·1만세시위 운동 등으로 인한 폭도진압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된 것이었다. 1896년 이래 대한제국의 서울개조사업은 일본의 이러한 파괴공작 속에 잊혀져 갔다.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385~386면.
그러나 이를 잊기에는 그 사업의 의도와 대한제국의 의욕에 대한 역사적 의의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할 것이다.
Ⅴ. 마치며
동아시아는 지난 한 세기동안 크게 변화하였다. 정치체제상으로는 이념적 차이가 존재하고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실현도가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일본은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자리 잡고, 한국은 분단 상태임에도 빠른 경제성장을 보였다. 중국도 뒤늦게 자본주의 경제로 진입했지만, 짧은 기간에 괄목할만한 신장세를 보여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동아시아 각국의 이런 경제성장은 원활한 국제관계로 뒷받침되어야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동아시아 각국은 이 점에 대한 대책 강구에 아주 소홀하다. 필요성을 느끼는지는 몰라도 구체적인 대책을 모색하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역행적인 현상으로 역사분쟁을 계속 일으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중국의 동북공정 작업과 일본의 역사관련 망언들은 올바른 동아시아관계 정립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 현재의 역사분쟁의 양상으로 보면, 이러한 문제는 동아시아의 발전적 미래를 위해 더 이상 미루어질 수 없는 한계선에 도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 세기의 영광에 대한 일본의 집착에 이어, 중국의 소수민족 끌어안기를 위한 거대 프로젝트는 1880년대에 한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벌인 양국의 경쟁이 재현되어가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올바른 역사관의 정립과 사실적 증거에 기초한 우리역사의 모습을 찾는 것은 중요하다. 국가 간의 역사인식 차이 또는 대립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이며, 그 현재적 상황이 어떤 역사성을 가지는 가를 생각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제까지 부정적으로 알려져 있던 대한제국과 고종황제의 참모습을 알아가는 것은 우리가 잊고 있던 역사를 되찾는 동시에 우리의 역사가 결코 비관적이거나 실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다. 비록 대한제국 시대에 대한 연구와 자료가 현재까지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일련의 연구를 통해 드러나고 있는 고종황제의 모습과 대한제국이 취한 각종 개혁과 근대화에 대한 노력은 올바른 역사를 정립해 나가는데 있어 도움을 주고 이를 통해 동아시아 각국의 역사인식에도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의 식민 지배를 통해 감추어져 왔던 대한제국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이 암약한 군주와 무능한 정부가 아닌, 당시 시대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던 노력의 주체로서 갖는 의의를 보여주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參考文獻
이태진김재호 외 9인, 고종황제 역사청문회, 푸른역사, 2005.
이영훈,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4.
안병직이영훈, 맛질의 농민들, 일조각, 2001.
김건태, 조선시대 양반가의 농업경영, 역사비평사, 2004.
이태진,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2005.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현광호, 대한제국의 대외정책, 신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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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4.30
  • 저작시기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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