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의 역사적 해석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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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본문내용

화되었다. 소강절이 산출한 요의 즉위 년 또한 그 절대 연대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객관적인 근거를 지닌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도무지 중국 사학계에서 요가 즉위한 해를 절대 연대로 정하여 이를 믿는 이는 없는 형편이다. 자연 기원전 2333년이란 단군 즉위 원년의 절대 연대는 사실로서의 의미는 없다. 그런데 <삼국유사>등에서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단군이 요와 동시기에 즉위하여 건국하였다고 하는 데에 있다. 요는 공자가 인문의 세계를 처음 연 성군으로 높이 추앙하였던 임금이며, 공자 이후 요와 순의 치세는 이상시대로 널리 인식되어 왔다. 바로 그러한 요 임금과 동시기에 단군이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점을,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나라가 중국과 대등한 시기에 건국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의식을 나타내고자 하였다는 데에 <삼국유사>등에서 전하는 고조선 건국연대의 의의가 있는 바이다. 따라서 단군신화에서 전하는 단군의 즉위연대는 그 절대 연대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당시 인들이 내세우고자 하였던 의식을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원시사회에서부터 초기 고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은, 외부로부터 어떤 집단의 이주와 정복에 의해 성립되는 경우가 아닌 한 점진적이다. 그런 만큼 초기 고대국가의 성립시기를 설정함에서 어떤 선을 그어 그 절대 연대를 찾는다는 것은 퍽이나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그에 관한 문헌 자료가 전무한 경우에는 더 그러하다. 그런데 국가는 천신이나 조상신 등의 신이한 힘에 의해 일시에 피조된 것이 아니며, 원시사회에서부터 존재하여 왔던 조직도 아니다. 국가는 일정한 역사 단계에 들어서 형성된 인위적인 조직체이며, 그것은 원시공동체의 해체와 계급분화에 따른 이차적인 사회관계에 토대를 둔 것이다. 자연 국가의 성립에는 일정한 객관적인 조건이 있어야 한다. 즉 사회분화를 가능케 하는 농업경제와 청동기문화의 어느 정도의 성숙이 그것이다. 이는 매우 일반론적인 언급이지만, 고조선 국가가 등장할 수 있는 시간적인 상한을 설정하는데 도움이 된다. 구체적으로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청동기문화가 확산되는 시기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기원전 10세기 전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그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동포, 즉 단추 모양의 조그마한 청동기들이 확인되어진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청동기의 사용으로는 국가의 형성을 논할 객관적인 요건이 되지 못한다. 무기나 의기와 같은 청동기의 본격적인 사용은 비파형 동검문화 단계에서부터 였다. 비파형 동검문화의 등장 시기는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어, 빨리 보는 이는 기원전 13세기, 늦게 보는 이는 기원전 8세기로 보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국가의 형성은 빨라도 기원전 10세기 전후를 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기원전 10세기 이후 언제 역사상에 고조선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나? 이에 대해서는 조선에 관한 언급을 담은 이른 시기의 문헌을 살펴보면, 먼저 중국의 춘추시대 제의 재상인 관중이 저술하였다고 하는 <관자>라는 책의 경중갑편과 규도편에서 제와 조선간의 교역에 관한 논급이 보인다. 이 기사를 그대로 따를 경우 조선은 기원전 7세기에는 실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관자>는 관중의 이름에 가탁하였지만, 그의 저술서로 볼 수 없다. 그 책의 내용을 볼 때, <관자>는 그 내용의 대부분이 대체로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의 중후기에 걸쳐 제나라 인들에 의해 쓰여 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 중 경중편의 편찬 시기에 대해서는 전국 시대설, 진한과도기설, 전한 문제경제 시기설, 왕망 시기설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어 오고 있다.
따라서 이 <관자>에 의거하여 기원전 7세기에는 이미 고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물론 <관자>에 담긴 사상은 전국 시대 인들의 산물이라고 인정할 수 있지만, 그러한 주장을 개진하면서 이용한 자료자체는 그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전승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될 수 있을 뿐이며, <관자>의 기사에 의거해 고조선의 구체적인 등장 시기를 규정할 수는 없는 바이다.
다음 조선에 관한 언급의 시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전국책>의 기록이다. <전국책>권 29, 연책 1에 소진이 연 문후(기원전 361~333)에 대해 당시 연의 주변 상황을 말하면서 “연의 동쪽엔 조선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으며...”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조선이 연의 변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며, 연의 국세와 대외관계를 논할 때에 주의할 대상이 되었던 세력집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기>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한편 <위략>에 의하면, 기원전 323년에 연후가 왕이라 칭하니 조선 후 역시 왕이라 칭하고, 양국 간에 갈등이 있었음을 전한다.
이런 문헌 기록들에 의할 때, 고조선은 늦어도 기원전 4세기 중반에는 북중국 사람들에게 그 실체가 알려졌으며, 연의 동방에 있던 유력한 세력 집단으로서 연과 대치 상태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어디까지나 고대 중국인들에게 고조선의 실체가 알려진 시기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고조선 자체는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을 수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고조선이 역사상에 등장하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므로 문헌을 통한 추정은 더 이상 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처럼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청동기문화가 보급된 시기는 구체적으로는 비파형 동검 문화의 성립 시기는 기원전 10세기 전후이다. 자연 고조선의 등장시기 또한,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5세기 사이의 어느 시기로 상정해 볼 수 있다. 구체적인 시기에 대해서는 고조선 인들이 남긴 유물유적들을 통해 추론해 보아야 할 것이며, 이는 앞으로 계속적인 조사 발굴과 연구가 요해지는 과제이다.
--------- 참고문헌 ---------
나희라, <단군에 대한 인식-고려에서 일제까지>,
『역사비평』1992년 겨울호(19호), p.214-224
단군신화, 어떻게 봐야 하나 권오영
역사적 실체로서의 단군 노태돈
단군신화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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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06.05.09
  • 저작시기2006.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8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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