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의 성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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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들어가는 말

2.조선시대 궁궐 내 지위에 따른 성생활
1)왕의 성생활
2)왕비의 성생활
3)후궁의 성생활
4)내시의 성생활
5)궁녀의 성생활

3.맺음말

본문내용

씨 즉, 정자가 보관된 음낭을 더욱 중요시했을 것이다. 때문에 이빨을 사용하지 않고 혀를 이용해 음낭을 부드럽게 자극함으로써 왕을 기쁘게 했다”라는 말도 있다.
섹스만큼이나 성감을 높여주는 것이 키스인 법, 성은을 입을 궁녀들은 왕을 잡아두기 위해 키스 방법 수련법도 있었다. 금가루가 섞인 소금으로 양치질을 하거나, 꽃잎을 말린 것에 소금을 곱게 갈아 섞어 양치질을 했다고 한다. 왕의 성은을 입은 궁녀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임신이었다. 왕의 씨를 잉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거론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임신이 잘되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 그녀들은 바닥에 팥을 뿌려두고 무릎으로 조이는 힘을 키우는 연습을 했다. 이는 기가 상하로 흐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임신에 큰 도움이 된다. 또 얼음물을 배꼽으로 받는 행위인데, 누워서 배 위에 천을 덮고 떨어지는 얼음물을 정확히 배꼽으로 받는다. 이 방법은 태아와 모체를 연결하는 통로가 자극을 받아 임신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섹시한 궁녀 되기 1, 2, 3_알몸으로 자고 아침에 마늘 먹어라♀
1. 잘록한 개미허리로 섹시하게: ‘아침저녁으로 식사한 후 초마늘 2∼3쪽을 먹으면 허리가
가늘어진다’는 이야기가 궁중에 내려올 정도로 초마늘은 궁녀들의 사랑을 받았다. 마늘의
알리신 성분이 혈행을 촉진하고 피부가 약산성을 유지하도록 도와 노화 방지에도 도움이
된다.
2. 마릴린 먼로처럼 알몸으로 자기: 마릴린 먼로가 향수 몇 방울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잤다고 해서, 미인들의 취침법으로 유명해진 나체 수면법이 사실은 조선시대 궁녀들의 필살기였다. 궁녀들은 잘 때 보드라운 피부를 위해 옷을 입지 않고 나체로 취침했다고 한다. 사람이 잠을 잘 때 피부도 충분한 휴식과 세포재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알몸으로 자면 도움이 된다.
3. 쑥과 무청으로 목욕하기: 궁녀들은 아름답고 탄력 넘치는 피부를 위해 쑥과 무청을 이용한 목욕을 즐겨했다. 헝겊에 말린 쑥을 넣고 욕탕물에 우려낸 뒤 몸을 담근다. 여기에 볶은 소금이나 죽염을 넣으면 더욱 좋다. 피부 노폐물 배출을 촉진하는 효과가 탁월한 무청 목욕법은 말린 무청이나 순무잎을 욕탕에 넣어 우려낸 물로 목욕하는 것이다. 목욕하기 3~4시간 전에 담궈야 충분히 우러난다.
♀궁녀들의 성생활♀
조선 시대 현직 궁녀들의 간통은 참형으로 처벌되었다. 이러니 죽을 작정이 아니라면 감히 궁녀들이 남자와 간통할 수가 없었다. 만약 궁녀랑 같이 자서 궁녀가 임신이라도 했을라 치면 남자는 먼저 죽이고 궁녀는 출산을 기다렸다가 애를 낳자마자 죽였다 한다. 조선시대 헌법인 경국대전의 보강판인 속대전에는 아무리 죄인이라도 애를 낳으면 100일간 산후조리와 아이에게 젖을 물린 다음 죽였는데 궁녀는 그런 예외조항에서도 빠졌다. 그리고 즉결처형이었다. 어쩌다 궁녀가 출궁하여 사가로 나와 살게 되더라도 궁녀를 범하면 장 100대에 처했다 하니 궁녀를 건드린다는 건 ‘상당한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나 궁녀에게 성욕 자체가 없을 수는 없었다. 남자와의 성이 금지된 젊은 궁녀들은 함께 사는 하녀나 친구들과 동성애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궁녀들 사이의 동성애를 보통 대식이라고 했는데, 대식은 은밀하게 행해지므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이 많지 않았다. 이렇듯 은밀하게 행해지던 궁녀들의 동성애가 겉으로 드러난 대표적인 사건이 세종 때 있었다. 세종의 큰며느리 봉씨가 궁녀와 동성애를 벌이다 적발되어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봉씨는 세종의 두 번째 큰며느리였다. 문종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김씨는 학문에만 열중할 뿐 자신을 모른 체하는 남편을 견디다 못해 압승술을 행하다가 시아버지 세종에게 적발되었다. 그러나 김씨가 쫓겨난 후 들어온 봉씨도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다. 봉씨의 동성애 상대자는 자신의 지밀에 있던 소쌍이라는 궁녀였다. 봉씨는 소쌍을 육체적 동성애 상대로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사랑했던 듯하다. 거의 매일 밤 독수공방하는 봉씨는 늘 소쌍을 데리고 잤다. 봉씨가 소쌍과 잔 날에는 이불과 베개를 직접 거두고 다른 궁녀들은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심지어 이불과 베개를 몰래 빨기도 했다. 당연히 세자빈이 궁녀와 동성애에 빠졌다는 소문이 궁중에 파다하게 퍼졌고, 이런 소문은 돌고 돌아 세종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봉씨는 내쫓기고 말았다.
궁녀와 내시 간의 사랑도 있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을 궁궐에서 함께 지내다 보니 서로정이 들었을 것이다. 세종 때의 궁녀 내은이와 내시 손생이 그런 관계였다. 둘은 정이 깊어지자 미래를 언약하기도 했다. 그 징표로 내은이는 세종이 쓰던 청옥관자(靑玉貫子)를 손생에게 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났던 일은 이것이 전부였지만, 이 사실이 적발되자 세종은 두 사람을 참형으로 다스렸다.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한 세종이었지만 궁녀들의 성 문제에 대해서는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이렇듯 엄격한 기강으로 조선 시대 궁녀들의 성은 금지되었다.
3.맺음말
조선시대에서의 유교사상은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다. 집권층의 대부분이 성리학자였고, 이에 따라 조선의 정치적, 사회적 제도와 관념들이 유교적 방식을 따랐다. 이는 궁궐 내 성생활도 예외는 아니었다. 왕실의 최고 권력자인 왕은 절대 권력을 이용하여 그들의 색욕과 성욕을 채웠으며, 엄격한 궁궐문화로 암묵적 순결을 강요당한 왕비는 함부로 자신의 성욕을 표현할 수도 없었다. 궁녀에게는 왕의 승은을 입는 것이 평생의 꿈 이였으며, 승은을 입지 못할 경우 궁녀 간 동성애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남성으로서의 상징을 잃어버린 내시들은 그들 자신의 방식대로 성생활을 행하였지만, 뜻대로 잘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궁의 성생활을 조사하면서 그들도 비록 궁 안에서 각기 다른 신분으로 지냈지만, 성욕을 채우기 위한 노력들은 비슷했던 걸로 보인다. 바깥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갔지만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 역사의 은밀한 부분 속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 성생활을 보며 그들도 보통사람이 되고 싶어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참고자료-
궁궐의 꽃- 신명호 지음
내시와 궁녀- 가람기획 박상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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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5.17
  • 저작시기20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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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49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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