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간도 지역의 독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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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간도 지역의 독립 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이상룡(李相龍, 1858(철종 9)-1932)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회에서 재만한인의 토지소유전매조차금지안(土地所有轉買租借禁止案)이 가결되었다. 그는 유하현 지사를 상대로 교섭을 벌이고 중화민국 국회에 건의서를 보내 재만한인이 당면하고 있는 처지를 밝혀 귀화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재만한인이 지켜야 할 중국인과의 관계,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항일자세 등을 재만한인에게 호소하는 <경고남만주교거동포 警告南滿洲僑居同胞>를 발표하였다.
이어서 1914년 <존화양이변 尊華攘夷辨>을 발표해 종래의 화이관(華夷觀)을 비판하면서, 우리도 교육만 잘 받으면 문명인이 될 수 있다고 하여 한민족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7년에는 길림(吉林)의 총독과 재만한인의 권익 확보를 위한 교섭을 벌였다.
1919년 3ㆍ1운동 뒤 한족회를 바탕으로 군정부가 조직되자 총재로 추대되었다. 5월에는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해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였다.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해외독립운동 선상에서 한 나라에는 하나의 정부만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 따라, 11월 군정부를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칭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남북만주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1921년 1월 서로군정서와 의용군 일부를 정비해 관전현(寬甸縣) 삼도항(三道港)에서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개최, 서간도일대의 항일단체와 독립군단을 통합해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다. 그 해 4월에는 북경(北京)을 중심으로 상해ㆍ만주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지휘권 문제, 앞으로의 방향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1922년 8월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남만한족통일회를 개최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수립하고, 그 산하에 의용군을 조직하였다.
1924년 10월 정의부가 발족되자 독판(督辦)에 선출되었다. 1925년 9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과 항쟁으로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게 되자 국무령을 사임하였다.
서간도 반석현(磐石縣) 호란하(呼蘭河)로 돌아와, 정의부ㆍ참의부ㆍ신민부의 통합운동을 지도하였다. 1932년 5월 병으로 길림성 서란(舒蘭) 소성자(小成子)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5』, 1973
한시준, 『한국광복군연구』, 일조각, 1993
김윤환 외, 『독립운동총서 4, 독립군의 전투』, 민문고,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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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06.06.20
  • 저작시기2006.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55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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