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청래(황사영 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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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박청래(황사영 백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로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한 그의 사상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나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중대한 협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국가를 전복하려는 반민족적인 행동이 아니라 천주교 수용을 거부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정부에 대한 위협임을 강조하였지만,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반민족적 방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군대를 동원하면서도 백성과 나라에는 해로움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참조: 여진천,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의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 획득 방안에 관한 연구, 28.
3.3. 백서의 영향 및 평가
1801년 9월 29일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발각된 <백서>에 대해 당국자들은 전대미문의 흉서로 규정하고, 특히 청국의 종주권 발동 · 내복, 감호책 · 대박 청원을 3흉조라고 규정하고 있다. 조광(역), 조선왕조실록 천주교사 자료모음, 한국 순교자 연구1,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1997, 250. (순조실록 3권, 1년 10월 5일(무신))
그러면서 박해가 더욱 맹렬하게 되었고 국외적으로는 신부의 일이 <백서>에 언급됨으로써,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1801년 10월 동지겸진주사 편에 <토사주문>(討邪奏文)과 본래의 <백서>를 1/15로 줄인 <진주사 등본>(進奏使謄本 假帛書)을 청나라로 보냈으나 청나라가 이를 문제 삼지 않음으로써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는 해결되었고, 12월에는 <토사반교문>(討邪頒敎文)을 반포함으로써 국내의 박해도 일단락되었다. 이와 함께 <백서>는 당쟁의 빌미로도 이용되어 1818년에는 홍희운의 <백서> 안작설(作說)까지 나오기도 하였다. 참조: 방상근, 황사영백서의 분석적 이해, 12.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백서>의 영향은 이것이 당시인들의 천주교관을 더욱 왜곡시켰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황사영 백서가 비판받는 가장 큰 원인인 대박 청래는 바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결코 무력을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1796년 이래의 대박 청래 움직임은 집권층에게 다른 나라와 몰래 통하여 국가를 해치려는 의도로 받아들여졌다. 그리하여 1791년 진산 사건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천주교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 이를 통해 결정적으로 증폭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백서>를 역모에 대한 확실한 물적 증거로 간주하였고, 특히 유관검 등의 공초에 나타난 대박 청래와 일장판결의 증거를 <백서>에서 찾음으로써 이러한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또한 기해박해 때, 정하상 · 유진길이 성직자를 영입하려는 계획을 황사영이 <백서>에 언급한 내용을 실행하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참조: 같은 글.
당시까지는 당쟁 관계, 유교적 이념과의 충돌이 주된 박해 이유였지만, 이제 서양 세력에 의탁한 반민족적 · 반국가적 집단으로 천주교인을 인식시키고 아울러 이러한 요소가 박해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백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집권층 뿐만 아니라 천주교인들에게도 나타난다. 즉 기해박해 때 체포된 유진길과 정하상은 황사영을 역적으로 평하였고, 달레와 뮈텔 주교는 <백서>의 내용이 황사영의 흥분한 상상에서 나온 비현실적이며 무모하고 위험한 계획임을 인정하였다. 교회 내의 평가가 이러할진대 일반 사가들의 평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천주교도의 극단적인 행위’, ‘외세를 끌어들여 자기 나라를 침략하게 하려는 반민족적인 행위’ 등이 학계에 알려진 황사영과 <백서>의 평가였다. 참조: 여진천, 조선 후기 천주교인들의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 획득 방안에 관한 연구, 32.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과 함께 종교적인 측면 즉 천주교 신자로서 황사영이 의도했던 바도 아울러 검토하는 것이 이에 대한 올바른 평가라고 생각된다.
맺음말
앞서 살펴보았던 이와 같은 사건이 일어난 신유박해로 정치적으로 남인이 거의 몰락하게 되었고, 교회적으로 유관검, 황사영 등이 서양 선박 영입을 시도한 것 때문에 대역부도의 죄로 사형을 당하였고,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거나 유배를 감으로써 조선 교회는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18세기 후반에 교회측에서 서양의 선박 즉 양박을 불러오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19세기의 집권층들이 인식하고 있던 것처럼 조선의 국가체제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였다고 단정 지을 수만은 없다. 대박 청래를 주장한 사람들은 천주교를 신앙하는 나라에서 조선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심어 주기 위해 배를 보냈을 때, 절대로 나라를 침범하거나 점령하여 그 국민을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이는 서양 대박 청래에 관한 기본적 인식으로서, 1790년 윤유일이 북경에 가서 청원한 것,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청원한 것, 그리고 황사영이 <백서>에서 대박 청래를 호소한 것 모두가 동일한 인식하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은 1801년에 드러난 8자 흉언 즉 “대박청래(大舶請來와 일장판결(一場判決)”을 천주교 신앙 활동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처럼 이해하였고, 이것이 황사영의 <백서> 사건과 결부되면서 천주교 박해에 가장 타당한 구실을 제공해 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 결과 후대의 연구자들도 대박 청래 계획에 관한 한, 일부 신자들이 지니고 있던 의식 형태를 이 계획의 실질적인 배경이었던 것처럼 설명해 왔다. 더 나아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노력을 일종의 혁명 사상 또는 의타적인 모화사상의 발로였다고 설명함으로써 천주교회를 이상향을 추구하는 비현실적 집단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제 대박 청래 계획의 과정과 내용을 구조적으로 검토함으로써 관련 자료들의 실체를 이해하고, 그 배경과 목적을 재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황사영에 대한 평가 또한 중요하다. 이것은 결코 민족적인 정서가 무시되는 상태에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 다만 그가 제시한 방법이 반민족적 · 반국가적이었던 사실은 인정하면서, 황사영 자신이 당시 천주교인으로서, 민족 구성원으로서 겪고 있던 갈등과 고뇌, 즉 그가 지녔던 바른 지향을 드러내는 것이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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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6.09.16
  • 저작시기2005.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64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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