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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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작을 81.4월 한, 독 교회 협의회에서 NCC안에 통일 문제 연구위원회를 두기로 하였다. 86,9월 1차 남북 기독자회의가 스위스 글리온에서 개최를 하였다. 평양에 첫 예배당 봉수교회가 건립중인것을 87년에 전해옴.
책을 덮는다. 그 두꺼운 한국기독교회의 역사책을 다 읽었다. 내용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인식은 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는 것에 대해 가슴이 뿌듯하다. 역사를 통해서 초대교회 신앙의 선배들의 신앙의 삶을 간접적으로 나마 체험을 했다. 책을 덮으면서 감회는 나 자신을 비롯한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들이 너무나 쉽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고 주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도 너무나도 쉽게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우리 선조들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렇게 까지 순교적 삶은 살지못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혹은 역사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가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나의 삶 또한 역사이다. 적어도 역사 책에 기록은 되지 못할지라도 나의 개인적인 삶이 이 역사에 조금이나마 흔적으로 남을것이기에 더욱더 열심히 주의 길을 가련다.
교수님, 한 학기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양화진을 다녀와서
9632086 박 동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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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까지만 해도 화창한 가을날씨였었는데 갑자기 날씨가 을씨년 스러워졌다. 하늘도 오늘 양화진을 가는것을 아는 것일까? 종교개혁제 행사관계로 오후 수업이 휴강이어서 양화진을 다녀오게 되었다. 한국교회사 수업을 받으면서 그리고 신학생으로서 아직까지 한번도 양화진을 다녀 오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작년이던가 동기 한명이 우즈베키스탄으로 견습선교사를 나가기 전에 양화진을 한번 다녀와야 겠다는 말에 처음으로 양화진이라는 이름을 듣게 되었었다. 그 친구는 이땅에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해서 왔다가 순교를 당하신 분들을 먼저 뵙고 가는것이 예의일거라 하면서 양화진을 찾아갔었다. 친구의 그런 신앙적 삶에 있어서의 진지함에 사실 부끄러웠다.
전철을 타고 약한시간 정도 가서 합정역에서 내렸다. 더이상 갈 수도 없었다. 당산철교 공사관계로 더이상 전철은 달릴 수 없었다. 양화진에 도착했을때 주위는 지하철 공사로 인해서 너무 어수선하고 산만한 분위기 였다. 바로 옆으로 한강이 보이고 그 위에 양화대교가 강 이끝에서 저끝까지 이어주고 그리고 강 건너편에는 국회의사당이 보였다.
그렇게 쉽지 않게 찾아간 양화진에 도착했을때 가을비가 처량하게 내리고 있었다. 죽은선교사들의 삶이 불쌍한지 하늘도 우는 것인가?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건물하나 가운데 서 있을뿐 문은 잠겨있었고 다만 관리 아저씨 한분만 계셨을뿐 썰렁했다. 그리고 비석을 한번 만지고는 지나가는 바람과 달리는 자동차 소리뿐.
건물 옆에는 보호수 나무 한그루가 크게 서 있었고 그 옆으로 조립식 공중화장실이 있었는데 굉장히 지저분했다. 이런 것들로 인해서 처음 양화진을 대한 나자신과 함께 동행했던 동료들의 마음이 그렇게 좋지만은 못했다. 그리고 더욱 우리의 마음을 편치 못하게 했던 것들은 순교한 선교사들의 비석들의 보전 상태가 그렇게 좋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간 양화진. 비석들을 둘러보면서 교회사 시간에 책으로 나마 배웠던 그랬기에 다소 익수한 이름들이 나오기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건물앞에서 정연희 시인이 쓴 봉헌'이라는 시가 쓰여져 있었다. 영혼의 고향, 하늘나라로 가는 길목. 이곳이 처음으로 이땅에 선교사들이 복음을 심어주고는 하늘나라로 간 그 길목인 것이다.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나는 웨스트 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처음 비석을 본 순간 나의 마음은 진한 감동이 밀려왔다. hOMER B. HULBERT(1863-1949)선교사가 남긴 유언이었다. 자신이 지금 처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였기에 그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Henry Gerhart Appenzeller(1858-1902) -미, 북감리회 해외 선교 본부에서 한국에 최초로 파송된 선교사였다. 목포 앞바다 전복된 배에서 소녀 구하다가 익사를 했다.
어느 선교사 부인의 비석은 십자가의 오른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가 있었기에 그것이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또 어떤 비석은 목이 떨어져 나간 십자가 또한 있었다. 어떤 것은 무덤인지 땅인지 구분이 가지 않은것도 있었다.
AVISOn, 호러스, 홀튼 언더운(원한경), 죤 언더운(태요안)등의 익숙한 이름들의 무덤이 눈에 띄었다. 그 많은 비석들중에 국화바구니가 놓여 있는 비석은 하나있었다. 그는 Joseph, e, gacce이었다. 그의 비석에 쓰여진 문구가 발길을 잡았다.
He Lets me rest in field of green gracs And leads me to quiet pools of fresh water
양화진에는 어떤 비석은 보기에 멋있고 눈에 띄는 큰 비석이 있는가 하면 어떤 비석은 초라하기 그지 없는 비석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순교한 순교자들 아닌가?
양화진의 정식 명칭은 한국 기독교 선교 기념관 외국인 묘지 공원이었다. 이곳의 유래는 옛 한양방비 5진의 하나로서 한강 남부 경기도 연해안의 나루터였다. 여기에는 500기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다소간 무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겨서 여기가지 온참에 가까이에 있는 절두산으로 갔었다. 절두(切頭)산은 1886년 병인년에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 서양 오랑캐들 대신 천주교도들을 죽이기 위한곳이 었고 또 병인박해 동안 수천명의 신자들이 이곳에서 목이 잘려 죽었던 곳이었다. 이 절두산은 양화진에 비해서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시설이 좋았고 깨끗해 보였다. 발걸음을 돌리면서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와서 죽어간 선교사들의 피맺힌 절규가 들리는듯 하다.

키워드

한국,   선교
  • 가격2,300
  • 페이지수17페이지
  • 등록일2002.10.05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5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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