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황제의 근대 민족국가 건설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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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序) - 근대 전후의 한국 민족주의 개관

0. 들어가며

1. 고종의 민국정치 이념과 국기 제정
(1) 고종의 정치의식
(2) 국기(國旗) 제정과 정체성 형성의 노력
(3) ‘대한(大韓)’이라는 국호의 제정

2. 개화 정책을 위한 고종의 신도서 구입사업
(1) 고종의 개화를 위한 신도서 구입사업 논의의 의의
(2) 규장각도서 중국본의 원 소장처별 구성
(3) 고종의 집옥재 경영과 중국도서 수집

3. 고종 시대 서울의 근대적 도시 계획사업
1. 19세기 조선 서울의 모습
2. 19세기 서울을 만든 고종의 노력
(1) 자주적 과정으로서의 도시 개편
(2)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시민광장의 등장
(3) 고종의 수도 건설 계획의 목적

4. 결론에 대신하여

본문내용

하나인 운종가와 접하고 시전이 발달해 온 중심지였던 데다가, 정조 때는 어가의 행렬이 멈추어 서서 평민들의 의견을 접수하던 곳이기도 했다.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p. 347
이러한 입지의 선택은 선대의 영, 정조 등의 능행차와 마찬가지로 민의를 수렴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시민공간을 조성 당시부터 고려에 넣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
탑골공원과 같은 입지가 시민공원으로 발전했다는 것은 이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해 준다. 민의의 반영의 장소, 그것은 바로 민주적인 시각에 대한 발전을 끌어올 수 있도록 하는 고종의 시도라고 생각한다. 국가 내의 문제를 직접 들어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시민들로 하여금 국가라는 것에 대한 소속감을 더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종의 시민공원 건설은 국민적 정체성을 위한 하나의 시도로 평가할 수 있으며, 실제로 서울에 근대적인 민의(民意)의 구현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또한 적극적이고 철학을 갖춘 도시계획이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점수를 받을 만하다.
3) 고종의 수도 건설 계획의 목적
고종이 이렇게 적지않은 규모의 새로운 도시 사업을 펼치면서 의도한 것은 무엇일까?
우선 고종은 그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었던 일본에 대한 자주적 태도를 보이고 자주적 근대 국가의 기틀을 닦는 것을 수도인 서울의 도시 정비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 것으로 해서된다. 황후 시해 후의 아관파천, 경운궁의 건설과 시위대의 양성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합리적인 근거를 가진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런 목적을 수행하는 주체는 고종 및 그의 휘하에 있던 의정부의 관리들이었다. 고종은 왕도의 성격을 갖춘 도시로 서울을 정비하면서 민중들에게 황제의 상징으로서 왕도를 내보이고, 이를 중심으로 백성들을 통합하려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의도는 국권 침탈 이후 일제에 의해 같은 차원에서 반대 방향으로 시행되게 된다. 탑골 공원의 건설에서 볼 수 있는 광장과 공원에 대한 고민은 고종이 민의(民意)를 수용하는 데에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민국(民國) 정치 이념과 근대적인 민권 정치의 형태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게 한다.
4. 결론에 대신하여
민족주의는 근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노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근대 민족국가는 여러 가지 상징물의 제정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을 통합하고자 한다. 이전까지의 한국 근대 연구가 그러한 과정을 다루면서, 결국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고 국권을 빼앗기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이유로 국왕 고종과 대한 제국 정부의 근대화 과정에서의 역할과 성과에 대해 인색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통념에 대하여 고종이라는 역사적 주체의 노력을 부각시킴으로서 재조명의 시초를 마련해 보고자 하였다.
고종은 선대왕들의 민국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군주권을 중심으로 한 강력한 결속이 자주독립국가의 기반 확보에 더 유리하다는 입장을 지켰다. 이에 대한 평가는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추진한 개혁 및 근대화 정책들이 그 이후 일제의 강점 이전까지 기대할만한 성과를 낳고 있었는가 하는 연구, 즉 대한 제국의 각종 부국강병책의 성과에 대한 평가와 연결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1904년 국권 침탈의 국권 침탈로 인해 좌절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쉽지 않게 되었다. 대한 제국 정부의 광무 개혁의 성과가 의외로 자주적인 근대화에 성공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자 일제가 서둘러 국권을 침탈했다는 주장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pp. 328-343
은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논리적 공백이 많다.
규장각 도서와 같이 국가의 대표성을 가지는 장서는 수집 그 자체가 역사적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정조대의 규장각과 그 서적들이 18세기 한국 정치사 사상사의 중요한 대목으로 주목받듯이, 고종대 국왕의 의지로 모아진 집옥재 도서도 19세기 후반 한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자료로 파악된다. 특히 이들은 고종의 개화정책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수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은 선대왕들의 至治 실현을 위해 학문적 도구를 통한 왕정의 수행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복고 취향은 아니다. 고종시대의 상황은 선왕들과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에 이를 이해한 고종은 서양이나 중국과 같은 외국 서적을 연구함으로써 자주국가의 지위를 고수하기 위한 답안을 모색한 것으로 해석된다.
고종대의 업적으로 현대에까지 사용되고 국호와 국기, 그리고 서울 시가의 정비는 고종이 생각한 자주적 근대화의 자침이 무엇에 바탕하여 어디를 가리키고 있었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현대의 정체성 혼란과 근대 극복의 과제를 지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또한 적지 않다. 물론 아무리 될성부를 싹의 모습을 보였다 해도, 결국 외세의 힘에 패퇴하여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한 것은 부정되거나 떠넘겨져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근대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고종과 대한 제국의 위로부터의 노력은 진지하게 다시 논의될 필요가 있다. 또한, 그 노력의 성공 여하에 관계없이, 어리석고 약한 군주라는 고종에 대한 평가는 동도서기론적인 발상에 기반한 자주적 근대화의 고민이나 영,정조의 민국 정치에 대한 신념, 그리고 국기 제정과 도시 계획에서 보이는 정책 철학으로 볼 때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서(序) - 근대 전후의 한국 민족주의 개관
0. 들어가며
1. 고종의 민국정치 이념과 국기 제정
(1) 고종의 정치의식
(2) 국기(國旗) 제정과 정체성 형성의 노력
(3) ‘대한(大韓)’이라는 국호의 제정
2. 개화 정책을 위한 고종의 신도서 구입사업
(1) 고종의 개화를 위한 신도서 구입사업 논의의 의의
(2) 규장각도서 중국본의 원 소장처별 구성
(3) 고종의 집옥재 경영과 중국도서 수집
3. 고종 시대 서울의 근대적 도시 계획사업
1. 19세기 조선 서울의 모습
2. 19세기 서울을 만든 고종의 노력
(1) 자주적 과정으로서의 도시 개편
(2)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시민광장의 등장
(3) 고종의 수도 건설 계획의 목적
4. 결론에 대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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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0.23
  • 저작시기2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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