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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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내 용

1. 로마의 공화정과 민회
2. 그라쿠스 형제의 경제개혁
3. 마리우스의 병제개혁
4. 동맹자 전쟁과 시민권의 확대
5. 술라의 로마진군과 국제(國制)개혁
6. 제 1 회 삼두(三頭)정치
7. 제 2 회 삼두(三頭)정치

Ⅲ. 맺음말

본문내용

다. 세 사람은 기원전 42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패퇴시킴으로써 삼두정치에 대한 최후의 저항을 분쇄했다. 카시우스는 곧 자살했고 부루투스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길을 따랐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대립이 삼두정치를 깨뜨렸다. 공동의 적을 제거한 다음은 내분이라는 정해진 길을 그들도 밟았던 것이다.
처음부터 열등한 위치에 있던 레피두스는 기원전 36년에 폼페이우스의 아들 식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제거한 전쟁 중에 폼페이우스의 일부 군대를 이용하려다 실패하고 지휘권을 빼앗긴 후 은퇴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이탈리아와 서방을 관할하고 안토니우스는 동지중해 지역을 통제했는데 안토니우스가 임신한 아내 풀비아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에게로 감으로써 처음부터 대립할 소지가 컸던 두 사람은 드디어 결별하게 되었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금은보화로 장식한 배를 타고 궁전에 들어와 화려한 알렉산드리아궁전의 메인 홀에 앉아 있던 안토니우스를 홀렸다고 한다. 역사적 안목이 있는 어떤 사람도 한 나라에 2인이 최고지배자를 둔 상태가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안토니우스의 동방행은 그의 인기에 큰 손상을 주었다.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로마에 남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영토를 클레오파트라에 주었다고 비난하면서 그의 동방행을 호기로 이용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옥타비아누스와의 피할 수 없는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들의 연합함대는 기원전 31년에 악티움해전에서 대패했고, 함대를 버리고 이집트로 돌아온 후 지상전에서도 패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어렵지 않게 이집트를 점령했다. 결국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결행해야만 했다.
동양의 양귀비처럼 서양의 미를 대표한다고 하는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유방을 물려 자살하는 ‘클레오파트라적 방법’으로 먼저 자살한 안토니우스를 따랐다고 한다. 이제 옥타비아누스는 전(全)지중해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어떤 심각한 도전도 받지 않는 1인 지배자가 되었다. 그는 기원전 27년에 전시(戰時)에 보유했던 모든 권한을 원로원에 반환했다. 그러자 원로원은 그 권한들을 되돌려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를 더해 주었다. 바로 로마가 실제로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황제가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지는 않았으나, 아우구스투수는 사실상 전권을 장악한 1인지배자가 되었고 공화국의 상징인 원로원은 형식적 존재로 전락했다.
Ⅲ. 맺음말
그리스 출신의 로마 역사가인 폴리비우스는 일찍이 “로마에 견줄 나라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로마는 역사적으로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로마는 그 넓은 지중해를 로마 안의 한 호수로 만들었다. 로마는 1천년은 그 이상 지중해 세계만이 아니라 유럽을 지배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다. 수도 로마시는 서양세계의 ‘영원한 도시’가 되었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든 길이 서울로 통하듯이 세계의 모든 길은 그 로마시로 통했다.
로마는 그 속에서 여러 정치적 변화를 겪게 된다. 특히, 나는 로마가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는 시기를 주목한다.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전환 한 뒤 대외전쟁으로 대량의 노예가 생겨나게 되고 포도나 올리브 등의 상품 작물을 재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로마의 대외전쟁은 이점을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로마는 이러한 노예들로 인해 로마의 소농민들은 이중 삼중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팽창하는 로마 제국을 다스릴 수 있는 어떤 무엇인가의 제도를 원했던 것이다. 이러한 로마의 사회개혁은 로마 공화정 후기에 나타난 그라쿠스형제의 개혁부터 마리우스, 술라로 이어지는 여러 개혁들이 후에 삼두정치가 나타날 수 있는 배경을 제시하게 된 것이었다.
역사란 그 어떤 것도 우연이 될 수는 없다. 저 사건과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되고 그 배경 속에서 우연하게 어떤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이 연관이 되어 어떠한 것이 나타나게 되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나는 로마 또한 그랬다고 생각한다. 로마가 공화정에서 왕정으로 바뀌게 된 것은 필연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시 로마의 팽창에 맞게 로마사회를 개편하게 된 것이 로마제정의 밑바탕이 되었고, 이어서 제정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된 것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묘미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어떤 역사적 사실이 왜 일어나게 되었으며, 또 그것을 알아가고 밝혀내는 그런 과정이 얼마나 흥미가 있는 일인지 말이다.
※참고문헌
인드로 몬타넬리 著,『벌거벗은 로마사 ①』, 풀빛, 1996.
사카모토 히로시 著, 『3일만에 읽는 로마제국』, 서울문학사, 2003.
진원숙 著, 『서양사 산책』, 서신원, 2001.
허승일 著, 『로마공화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7.
에드워드 기번 著, 『그림과 함께 읽는 로마 제국 쇠망사』, 청미래, 2004.
0 허승일 著, 『로마공화정』 p.11~12 참고
0 평민의 이익에 반하여 모든 법률, 법령에 대한 거부권(veto)이 있었으며, 집정관의 직무에도 간섭했다. 10명이 정원이었으며, 군사 호민관, 평민 호민관 등으로 나누어졌다.
0 사카모토 히로시 著, 『3일만에 읽는 로마제국』p.84~85
0 최고위 직책인 집정관은 원로원에서 선출된 이른바 "세속권력"의 대리인으로서 imperium(최고행정권, 곧 대권)을 가졌으며, 정원 2명에 임기 1년이었다. 초기에는 민회에서 선출했다. 그 임무는 옛 국왕(rex)처럼 종교권력의 장으로서 중요한 제의를 주재하고 원로원과 민회의 의장이 되어 그 결정에 따라서 법률과 법령을 반포, 집행하고 전시에는 군 최고지휘관이 되어 전군을 2등분하여 각각 지휘했다. 그러나 제권이 강대해지게 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proconsul은 속주 총독이라고 번역했다.
0 국가는 'res unius', 즉 1人物, 다시 말해 1인에게로 환원된 재산이란 뜻이다. 이렇듯 국가는 군주의 사적 소유물이기 때문에, 따라서 국가에 대한 책임도 국주 1인이 지면 그만이라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1인의 전제정치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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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2.19
  • 저작시기2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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