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공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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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공화정에 대해서...

Ⅱ. 공화정의 3요소
1.집정관(consul)
2.원로원(senatus)
3.민회(켄투리아회-->트리부스회)

Ⅲ. 로마공화정의 발달과정
1.로마 공화정 초기(BC 6세기~BC 264)
2.그라쿠스 형제의 개혁(BC 133~121)
3.공화정(BC 121경~91)
4.로마 공화정의 몰락(BC 59~44)
5. 12표법(十二表法)
6. 3두정치 三頭政治 (triumvirate)
7.호민관 (護民官 ; tribunus plebis)
8.콘술(consul)
9.원로원(senatus, 元老院)
10.코미티아(comitia)
11.키케로 (Cicero, Marcus Tullius ; BC 106~BC 43.12.7)
12.크라수스 (Crassus, Marcus Licinius ; BC 115~BC 53)
13.레피두스 (Lepidus, Marcus Aemilius ; ?~BC 13)
14.브루투스 (Brutus, Marcus Junius ; BC 85~BC 42)
15.리키니우스 (Licinianus Calvus Stolo, Gaius ; ?~?)

Ⅳ. 공화정 말기의 문제점
왜 로마에서 포에니 전쟁 이후 자영농민이 몰락했는가?

Ⅴ. 그리스 민주정과 로마 공화정

본문내용

영세한 농민들의 땅을 합법적으로든 불법적으로든(고리대금이 이에 아주 훌륭하게 이용되었다.)
마구마구 사들이며 대토지농장경영을 시작했던 것이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농민들이 다시 농업경영에 나서려 해도 고리대금에 시달리고 또 ..토지귀족이 경영하는 라티푼디움과의 경쟁에서 이길리는 만무했고 결국 로마공화정 말기에 가면 자영농민들은 줄줄이 도산해서 무산자가 되거아님 소작농의 처지로 전락했고 반면 원로원 토지귀족들의 대토지 소유는 확대되어 갔던 것이다. 이점은 바로 로마국방상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문제점을 일으키게 된다. 아시다시피 로마 공화정시절 군대는 재산의 보유에 따라서 편성되었다. 그런데 자영농민들이 몰락함에 따라 군대를 담당할 재산을 보유한 계층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따라 로마공화국에서는 여러차례의 군제개혁이 이루어져 ..좀더 재산을 적게 가진 사람을 징집하고 .. 종국에 가서는 무산자 계급 마저도 징집을 하게 됩니다만 ..이렇게 편성되는 군단의 질이 예전과 같았을리는 만무했다,.
바로 그라쿠스 형제가 이점을 타파하려 했던 것이다.
원로원 의원들이 5000유겔룸 이상 되는 토지의 소유를 금지함과 동시에 이이상 소유한 부분들은 국가가 유상으로 매입한 다음 이것을 다시 농민들에게 재분배함으로서 로마공화국내에 다시 자영농민들을 육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서 ..다시 로마군단의 강고한 기풍을 회복하려 했었던 것이다.
로마공화정체의 핵심적인 문제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라쿠스형제의 개혁은 안타깝게도 실패로 돌아가버리고 만다...
그시점에서도 벌써 로마체제의 경직화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원로원 토지귀족들이 기득권을 가진 세력화했고 이들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 드러내놓고 반발은 하지 못했지만 ..암암리에 음모를 꾸며 ..이들 형제를 실각시킨후 살해하는데 성공을 하게 된다. 이후 술라와 카이사르, 키케로 ..모두 원로원 정치의 한계점을 자각하게 됩니다. 국가가 조그마했을때는 중요한 사항을 원로원에서 토의하여 결정하는 것이 효율적이었지만 국가가 거대하여지고 또한 원로원 체제내에서 경직화현상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서 더이상 예전과 같은 통치효율을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던 것이다.
술라와 카이사르, 키케로 모두 ..사회체제가 이대로는 안된다...라는 점을 공감하고 있었다만 그 개혁방향에 있어서는 3인이 조금씩은 달랐다. 술라와 키케로는 원로원 체제 내부를 개혁함으로서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하고자 했지만 ..카이사르의 경우는 원로원은 두되 세력을 약화시키고 .. 또한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도입함으로 체제를 부수는 개혁을 하고자 시도를 했다. 카이사르는 그 결과 반동세력의 음모로 암살되기는 했습니다만 말이다.
Ⅴ. 그리스 민주정과 로마 공화정
아테네인의 민주제의 역사는 한마디로 폴리스의 모든 자유민 남성이 폴리스 내의 정치적 활동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추구해 가는 과정이었다. 아테네 민주제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폴리스라는 소규모 국가에서나 가능한 직접민주제였다. 둘째, 민주제가 실질적으로 운용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민회나 법정에 나가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을만한 경제적 역량과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했는데, 노예와 아테네제국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셋째, 아테네 민주제가 추구하던 자유는시민이라는 특권층만이 누리는 자유였다. 그 자유는 20세 이상의 성인남자만이 누리는 것이었고 여성, 노예, 외국인은 제외되었다. 근대민주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서정부의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둘째, 권력분립, 다수결의 원칙, 대의제, 다당제와 같은 형식적 원리에 의존하였다. 셋째, 소극적 정치의 성격을 띠었다. 즉, '최소의 정치가 최선의 정치'라고 생각되어 국가는 야경국가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게 된다. 넷째, 시민 민주주의로서 정치참여 계층이 '일정한 재산·교양'을 갖춘 시면, 곧 부르주아지아에 국한 되었다.
그리스문화와 헬레니즘문화 사이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면 합리주의적이고 인간중심적인 면을 지향하는 그리스문화의 특성은 그것이 개인적이 아닌 폴리스생활 속에서 생겨났다는 점이다. 반면에 개인주의와 세계시민주의로 특징지워지는 헬레니즘세계는 하나의 통일된 단일체가 아니고 여러 이질적인 문화가 제각기 혼합된 세계였다. 그런데도 '헬레니즘 세계'라는 말로 불려질 수 있는 것은 그 속에 그리스문화라는 공통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문화는 공통된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문화는 헬레니즘시대를 통해 폴리스문화에서 탈피하여 지중해의 국제적인 문화로 발전했다.
로마의 평민들은 국가방위에 상당한 공헌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다. 이에 평민들은 귀족의 정치독점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그것이 로마공화정 초기의 신분투쟁이었다. 평민들은 일단 군대 소집에 불응함으로써 귀족의 양보를 얻어냈다. 기원전 494년에 로마 평민들이 로마에 침입해 온 외적과의 전투를 거부하고 인근의 성산으로 철수하자, 귀족들은 평민에게 평민만의 집회인 트리부스평민회를 조직하고 평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관직인 호민관을 선출할 수 있도록 인정했다. 이어서 기원전 449년에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십이표법이 제정되어 귀족들의 자의적인 법운용에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기원전 367년에는 리키니우스-섹스티우스법의 제정에 따라 두 명의 콘술 중 한 명은 반드시 평민신분 중에서 선출되도록 규정되었으며 기원전 3세기초에 가면 콘술 이외의 다른 여러 관직들도 평민들이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287년의 호르텐시우스법은 이러한 평민권 신장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법에 따라 트리부스평민회의 결의는 이제 켄투리아회나 원로원의 인준 없이도 법률의 효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아테네의 민주화 과정을 보면, 솔론의 개혁과 참주정의 출현과정에서 아테네의 민중은 민주제를 이루어낼 만한 역량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클레이스테네스가 중갑병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으며, 페르시아전쟁에서의 승리이후 결성된 델로스동맹의 영향으로 최하층시민까지 포함되는 보다 완성된 민주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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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9.29
  • 저작시기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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