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팅게일 생애와 사상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내용

에서 또한 개인의 품성, 관습과 교양을 익히며, 기술과 실무적인 지식을 터득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나라 간호학생들의 임상 실습복이 나이팅게일 간호학교 학생들이 입었던 어깨 밴드를 매는 앞치마식 복장의 전통을 이어내려오고 있음을 우리는 기록사진을 보고 곧 인식하게 된다.
그녀는 런던의 South Street 10번지 (원래 그녀가 살았을 당시에는 35번지였음)의 집에서 1865년부터 줄곧 혼자 살며 지낸다.
고령이 이른 1896년 이후에는 단 한번도 외출하는 일이 없이 침실에서만 여생을 보내게 된다. 만년에 그녀는 수많은 젊은이들, 특히 생질과 조카딸들, 기타 친구들로부터 인자하고 존경받는 할머니로서 지극히 행복한 여행을 보낸다. 수많은 방문객들을 그곳에서 맞으며 지내는데, 대신, 왕족, 정치가 그리고 친구들을 항상 한번에 꼭 한사람씩 만났었다고 한다. 그녀의 인자함을 고깃간 주인, 순경들, 그녀를 돌보고 보살핀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미쳤으며, 당신 전 세계 수백만 여성들의 희망의 상징으로서 숭앙을 받았다.
그녀는 차츰 시력을 잃어 가다가 1901년에는 완전히 앞을 못 보게 된다.
1907년 에드워드 7세왕 (King Edware Ⅶ)은 여성에게 주어진 최고의 명예훈장-the Order of Merit-를 수여하였으나 그녀가 이것을 기뻐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었다. 같은해 6월 런던에서 개최도니 제8차 적십자 국제회의는 그녀에게 특별 메시지를 보내어 『적십자운동의 선구자로서, 괴로움을 받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귀하의 영웅적인 노력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한 모든 시대에 걸쳐 영구히 인정되고 존경받게 될 것이다』라고 찬양한다.
이 위대한 여성의 영면 (永眠)은 서서히 참으로 서서히 다가온다. 의식이 돌아오는 시간이 차츰차츰 짧아지고 1910년 2월 이후에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하였고, 1910년 8월 13일 정오경 최후가 온다. 그녀는 낮잠에서 영영 깨어나지 아니하였다.
영국정부는 고인을 유명한 웨스트민스터사원(寺院) (Westminster Abbey)에 안장하고 국장(國葬) (national funeral)으로 모실 것을 제의하였으나 생전의 간곡한 유언을 존중하여 유족들은 이를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녀의 또 하나의 소원, 유해를 의학연구를 위한 해부에 제공하여 달라는 사연만은 지켜지지 아니한다.
가족 묘지에 묻힌 그녀의 묘비에는 단 두 줄의 글이, 그것도 너무나 짤막하게 새겨졌는데 「에프엔(F.N.) 1820년 출행, 1910년 사망」이라고만 적혀 있다.
가족묘지는 런던의 이스트웰로우 (East Wellow)에 있고 고인의 관은 6명의 영국군하사관에 의하여 운구 되었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여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90년 3개월을 살다가 갔다.
자료원: Ceil Woodham Smith" Florence Nightingale"
Smith가 나이팅게일을 흠모하던중 그에대한 자료를 모아 펴낸 전기인데 1985년 이 전기를 대한 적십자사가 국제 간호사의 날을 맞아 번역 발췌하여 기고한 내용이다.
  • 가격1,0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7.01.10
  • 저작시기2006.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8762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