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의 성격과 종합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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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박정희정권의 국가적성격

!)박정희정권의 빛

!)박정희정권의 그림자

본문내용

던 중정요원 25명과 김씨를 오사카부두에서 부산까지 실어나른 ‘용금호’선원 21명의 명단 및 그들의 역할, 사후 중정의 관리내용이 모두 수록돼 있다.
79년3월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당시 대통령에게 보고한 이 문서 하단에는 ‘대통령 각하 보고필’이라고 적혀 있어 박대통령도 최소한 사건발생 후 납치 전모를 보고받았으며 중정의 진상 은폐를 추인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문서에 수록된 ‘KT사건행동별 관여인사 일람표’에 따르면 납치사건의 최고책임자는 이후락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으며 이철희 정보차장보―하태준해외공작국장(8국) ―윤진원8국공작단장―김기완주일대사관 공사 등으로 사건지휘가 이루어졌다.
또 나머지 중정요원들은 대부분 주일대사관이나 오사카총영사관 근무자들이며 현장책임자로 서울에서 건너간 윤단장의 지휘에 따라 △납치 △도쿄→오사카 안가(安家) △오사카→오사카부두 △오사카부두→부산 △부산→서울안가 이동 등 각 단계별로 9개조가 투입돼 치밀하게 움직였던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도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김대중씨를 납치하는 작전은 윤단장과 한춘 김병찬(일명 김동운) 홍성채주일대사관 1등서기관, 유영복, 유충국2등서기관이 맡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용금호가 부산에 도착한 뒤 김선배당시 중정 의무실장이 김씨의 건강상태를 진찰했으며 서울로 이송된 뒤에는 하태준국장이 직접 김씨의 상태를 확인했던 사실도 드러났다.
한편 특수공작의 경우 대통령의 결재없이 구두지시로 공작이 진행되고 대통령이 사후보고를 받는다는 정보관계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박대통령이 김대중씨 납치를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도 높다.
[4]종합 의견
박정희에 대한 의견은 분분합니다.
이번에 박정희정부의 국가적 성격과 그에 대해 조사하면서 저희가 느낀 의견을 적어보겠습니다.
5/16군사정변을 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당시에 이승만대통령이 부정선거를 지시하는 등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여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이것이 이른바 4/19혁명이라는 사건인데요, 그 이후에는 선거를 통해서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었습니다.
박정희는 당시 육군 소장이었는데요, 4/19혁명 이후 선거를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정부를 군사력을 동원해 뒤집어 버립니다. 이 사건이 5/16군사정변입니다.
박정희는 이렇게 군사정변을 통해서 대통령이 됩니다. 이것을 군사혁명 또는 구국의 단결이렇게 좋게 볼 수 도 있지만, 선거를 통해서 구성된 정부를 쿠데타로 뒤집어 버린것은 권력에 눈 먼 군인의 권력추구행동으로도 보입니다.
그 이후 박정희는 1963년 10월 3일에 실시한 총선거에서 제 5대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그리고 한국을 '잘살게'하기 위해 근대화 정책이라는 것을 수행합니다. 근대화정책의 핵심은 국토개발 5개년 계획인데, 기본적인 토대는 이전 정권(박정희가 뒤엎은 이전 정부)에서 마련한 것을 가져와 사용합니다.
한국전쟁이후 피폐해진 상황에서 농촌의 경지 정리, 사람들을 도시에서 많이 살게 하는 것(도시화), 많은 공장을 짓기, 공장에서 싼 물건을 많이 만들어 외국에 수출하기 등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을 폅니다. 또 고속도로도 만들고, 한강에 다리도 만들구요. 이 과정에서 '한강의 기적'이라 부르는 경제 성장이 일어납니다. 1970년대에 이르면 인형, 옷 등을 주로 만들던 공장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에서 석유제품, 철강, 자동차 등을 주로 만드는 경제시스템으로 전환합니다. 박정희는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 은행들로 하여금 회사에 많은 돈을 빌려주게 하고, 회사들로 하여금 수출 중심, 중화학공업 중심 등 정책적으로 육성하는 공업에 투자하게 하여 정부 주도 하에 경제를 성장시킵니다.
이때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하여 대기업을 집중적으로 성장시키다 보니, 현재 우리나라내부에서 대기업의 힘은 어느 나라와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을 만큼 커짐에 따라 정경유착 등과같은 잘못된 관습이 이때부터 생긴 것입니다.
물론, 한국전쟁 이후에 먹고 살 것도 없는 가난한 한국이 박정희 정권의 통치기간을 지나면서 보릿고개를 잊고 비교적 잘사는 나라로 탈바꿈했고, 이러한 강력한 지도력은 존경할 만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양적 성장일 뿐 완전한 발전이라고는 볼 수 없고, 성장을 이루기 위해 많은 노동자들이 한 달 생활비도 채 못 되는 아주 적은 월급만을 받고 오랜 시간 동안 힘들게 일해야 했다는 점, 회사로부터 억울한 대우를 받아도 항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물론, 박정희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였다면 이정도로 큰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없었겠지만 전쟁이 끝난 나라에서 근대화정책을 수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고요.
한편 박정희의 집권은 장장 18년동안 이어지는데, 세 번까지는 선거에서 상대방 후보를 어쨌든 이기고 당선되었지만 나중에는 헌법을 고쳐서 선거도 없는 장기 집권이 가능하도록 합니다. 지금은 대통령을 선거로 뽑게 되어 있는데, 박정희는 그렇게 하도록 한 규정을 바꾸어서 선거 없이도 계속 대통령직에 앉을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이것을 '유신'이라고 하는데요.
이 기간 동안에는 헌법이 정지된 것과 같이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을 말할 수도 없었고, 박정희나 박정희의 부하들이 저지른 잘못을 말할 수도 없었고, 유신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중앙정보부(지금의 국가정보원입니다)에 소리 소문없이끌려가서 고문을 받고 심하면 죽기도 했습니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민주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심각한 해악을 끼쳤습니다.
국가가 아무리 커다란 발전을 이뤘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지켜주기는 커녕 무참히 침해했다면, 국가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박정희 통치 기간 중에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지만, 그것은 많은 노동자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성장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는 간데없고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조차도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 얼마나 잘했느냐 잘못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잘한 것은 본받고 잘못된 것은 거울삼아 현재와 앞으로의 본보기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살고 싶은 나라, 떠나고 싶지 않은 나라로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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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1.19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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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89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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