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와 을미사변/흥선대원군/역사적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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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장. ‘명성황후’ 란 누구인가?

제 2장.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제 3장.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갈등

제 4장. 흥선대원군과 고종

제 5장.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본문내용

경복궁 중건을 무리하게 진행시켜 국가의 살림을 어렵게 했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병인박해)했으나 그로 인하여 외국의 조선에 대한 감정을 악화시켰으며, 국제 정세를 고려하지 않은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국가의 근대화를 더디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혁파하고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부패한 관리를 몰아냈다. 또한 조선 말에 당파의 온상이었던 서원을 대부분 철폐하고, 비변사를 없앴으며, 군포제를 개혁하여 호포제로 바꿈으로서 양반과 상민 모두 세금을 내게 하였다. 법전을 정리하여 정치사회적 기강을 바로잡고, 사창 제도를 확립하여 민중들의 괴로움을 해소시켰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을 무리하게 진행시켜 국가의 살림을 어렵게 했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병인박해)했으나 그로 인하여 외국의 조선에 대한 감정을 악화시켰으며, 국제 정세를 고려하지 않은 쇄국정책을 실시하여 국가의 근대화를 더디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고종 :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
아명 : 명복(命福), 초명 : 재황(載晃), 후에 형으로 개명.
자 : 성임(聖臨), 후에 명부(明夫)로 개자(改字). 호 : 성헌(誠軒).
영조의 현손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이다. 비는 민치록의 딸인 명성황후이다.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려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그 후 1873년(고종 10) 11월, 명성황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명성황후와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고종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나가야 했다. 1875년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개화당이 대두 되었다.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였다. 1882년에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청일전쟁을 유발하였고,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홍범14조(洪範14條)를 선포하여, 독립국으로의 위치를 찾고자 했다.
민씨 일족이 러시아와 결탁하여 일본 세력을 멀리하자, 일본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시행했다. 그리고 아관파천, 김홍집 등이 죽임을 당하면서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1897년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 결과 2월 25일 고종과 세자가 경운궁(慶運宮) (덕수궁(德壽宮))으로 환궁, 연호를 광무라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 왕을 황제라 하여 국체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1904년 노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강압으로 러시아와의 제 조약을 파기하고, 1904년 2월 22일 한일의정서에 조인, 8월 22일 제 1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 노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외교권을 빼앗았다. 1907년 제 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고종황제는 이준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제 2차 한일협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고, 일본은 책임을 물어 왕위를 순종에게 양위시키고 고종황제에게는 태황제의 칭호로 덕수궁에 머물게 되었다.
몇년 후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
제 5장. 명성황후에 대한 역사적 평가
명성 황후에 대한 평가는 20여 년에 걸친 그의 집권기에 시행된 정책과 그 결과를 바탕으로 냉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명성황후를 정점으로 하는 민씨 일족이 집권한 1873년부터 1895년까지는 우리 나라로서는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 밀려드는 서양 열강, 뿌리부터 흔들리는 봉건체제, 새로운 변화를 구하는 움직임, 이런 다양한 세력들이 얽히고 설키면서 임오군란 , 갑신정변, 동학농민 운동 같은 사건들이 일어났다.
대원군의 정책이 '쇄국'이었던 반면에 명성황후의 대응책은 '문호개방'이었다. 명성황후는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을 시작으로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과 차례로 수교를 맺었다. 명성황후에게 서양 열강과의 수교를 적극 권한 장본인은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다. 조선에서 청의 기득권을 지키고 서양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독주를 막으려는 생각에서였다. 오랑캐로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청의 이른 바 '이이제이'정책이다.
어찌되었든 문호개방을 한 조선의 당면 과제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는 일이었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과 산업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낡은 봉건제도를 허물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했다. 명성황후와 민씨 정권은 이 중 어느 것 하나도 충실히 해내지 못 했다. 그 결과 어느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개화 반대를 외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 중은 명성황후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도, 동학농민군도 모두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 타도를 외쳤다. 어느 쪽의 지지도 받지 못한 명성황후는 외세에 의지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명성황후로 하여금 재집권케 해준 것은 청나라였다. 동학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청에 지원군을 청하여 일본군 상륙의 빌미를 제공하고 그 결과 우리 땅에서 청일 전쟁이 벌어지게 한 장본인은 바로 명성황후였다. 청일 전쟁이 우리 땅에서 벌어지게 된 이유는 동학농민 운동 때문이 아니라 명성황후가 이끄는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 외세의존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나 지도력 면에서도 자신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흥성대원군과의 권력투쟁에만 몰두했다는 기존의 통설에서 벗어나 '열강의 위협 속에서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이끈 탁월한 정치가', '당시의 친일파와는 격이 다른 외교적 안목을 지닌 정치가', '개화와 척사의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 정치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조명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미미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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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09
  • 저작시기2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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