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설의 표기형식과 인쇄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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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론

본론
1. 고소설의 표기 형식: 기사된 문자에 의한 분류
1.1. 고소설 표기 형식의 개괄
1.2. 국문 소설(한글본)
1.2.1. 국문소설의 개념
1.2.2. <설공찬전> 국문본의 국문소설로서의 위치
1.3. 한문 소설(한문본)
1.3.1. 한문 소설의 개념과 범위
1.3.2. 한문 소설의 특징
1.3.3. 한문 소설의 의의
2. 고소설의 제작 방식: 인쇄 수단에 의한 분류
2.1. 옛 책 용어 분류
2.2. 사본: 필사본
2.3. 인본
2.3.1. 목판
2.3.2. 활자본
2.3.2.1. 금속활자
2.3.2.2. 목활자
2.3.2.3. 활자 소설

결론

본문내용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등을 찍었으나, 1403년(태종 3) 처음으로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고 수개월에 걸쳐 놋쇠로 수십만 자의 금속활자를 주조, 이것을 그 해의 간지(干支)에 따라 계미자(癸未字)라 불렀으며, 이때부터 활자는 주조한 해의 간지에 따라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다음 세종은 계미자의 뒤끝이 송곳 같아서 판짜기에 불편하고 능률이 오르지 않았으므로, 활자 모양을 고쳐 만들게 하여 1420년(세종 2)부터 2년간에 걸쳐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다. 이 경자자의 모양은 매우 정밀하고 인쇄에 편리하여 하루에 20지(紙), 또는 수십 지를 인쇄할 수 있었다 한다. 1434년에는 갑인자(甲寅字)를 주조하였고, 다시 큰 자(字)를 주조하기 위해 용해도(鎔解度)가 낮은 납을 쓰게 하였다. 이로부터 갑인자는 8차례나 재주조하여 가장 많이 쓰인 활자가 되었으며, 1484년(성종 15)의 갑진자(甲辰字)는 2차례, 1677년(숙종 3)의 한구자(韓構字)는 3차례, 1684년의 운각자(芸閣字)는 4차례, 1795년(정조 19)의 정리자(整理字)는 2차례를 주조하여 썼다. 석보상절자(釋譜詳節字), 동국정운자(東國正韻字), 강희안자(姜希顔字), 정란종자(鄭蘭宗字), 한호자(韓濩字), 무신자(戊申字:顯宗甲寅字), 운각자(芸閣字), 원종자(元宗字), 임진자(壬辰字:甲寅字), 전사자(全史字) 등이 놋쇠 또는 무쇠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전까지는 놋쇠 ·구리로 주조하거나 나무에 새겼으나, 이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목각자를 사용하였다. 그 후 차차 다시 금속활자를 썼는데, 대부분의 경우 나라에서 주조하였고 민간에서는 나무로 활자를 새겨서 썼으나 제한이 있었다. 임진왜란 후에는 활자의 등면을 깎아서 금속이 덜 들게 활자 모양을 바꾸었고, 후기에는 활자의 등을 파내서 경상(經床) 다리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판짜기에도 잘 고정되는 방법을 써서 인쇄 능률을 더욱 높였다. 이 밖에 그림을 새겨서 동판을 만들어 인쇄하는 방법도 인조(仁祖) 이후에 나타나게 되었다.
2.3.2.2. 목활자
목활자는 약간 규모가 큰 경우, 두께 한 치 정도의 나무판자를 만들고, 이를 다시 네모난 한 치 평방의 모기둥으로 켜, 웅덩이에 1개월 이상 넣어서 나무기름을 뺀 다음, 글자를 새길 면을 대패질해서 글자를 쓴 종이를 뒤집어 붙여 글자를 새기거나, 때로는 나무 면에 거꾸로 직접 써서 새기기도 한다. 이와 같이 글자가 새겨지면 글자마다 톱으로 잘라내고, 옆면과 뒷면을 다듬어 활자를 완성하는데, 작은 활자는 나뭇가지를 같은 방법으로 해서 만든다. 조선 초기부터 『대명률직해』,『개국원종공신녹권』등 여러 책이 목활자로 인쇄되었다. 지방 관청에서도 목활자를 이용하여 책을 인쇄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도 목활자를 이용한 인쇄가 발달하였다. 개인이 목활자를 제작하여 활자와 여러 인쇄 도구를 가지고 다니면서 책의 수요가 있는 곳에서 인쇄하기도 하였다. 족보를 찍어주며 다니던 인쇄행상들의 경우를 보면, 이들은 나무활자와 대나무로 만든 활자칸막이 서랍 및 활자정리판으로 조판하였고, 종이와 대나무로 만든 활자쟁반 등 가벼운 인쇄용 기구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러한 인쇄행상은 18∼19세기까지 성행하였다. 목활자는 지역과 만든 사람, 시대에 따라 형태가 다양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금속활자, 목활자, 목판 등을 이용한 다양한 형태의 인쇄가 가능하였다. 인쇄 기술의 발달은 많은 책이 간행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여 우리 문화 발달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2.3.2.3. 활자 소설
활자본 고전소설은 금속활자로 식자 조판하여 양지에 인쇄 출판된 소설을 말한다. 현재 활자보다도 굵기 때문에 이와 구분하여 구활자본이라고도 한다. 활자본의 체재는 처음에는 국판으로 표지에 내용을 상징하는 흑백 그림을 그려 출판하였다.
활자본 고전소설은 1910년대 초부터 출판되기 시작하였다. 신소설은 이인직의 혈의 누를 시초로 하여 등장하였으나 활자본 고소설의 출판은 1912년에 와서다. 이해조가 판소리계소설을 개작한 옥중화 강상련 연의각 토의간 등을 1912년에 매일신보에 연재하였고 이들 작품을 단행본으로 출판함으로써 활자본 고소설의 출판이 시작된다. 이시기에 300여 편을 상회하는 활자본 고전소설 중에서 200여 편이 이 시기에 간행되었다. 판소리계소설을 개작한 작품을 시작으로 영웅소설 중국소설의 번안 번역물 순으로 출판되다가 1920년대를 접어들면서 줄어들게 된다.
활자본 고소설은 필사본이나 방각본을 그대로 출판한 경우도 없지 않으나 내용을 어떤 형태로든지 변개한 것이 대부분이다. 인기가 있었던 장편소설의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부분을 떼어 재구성 혹은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여 배경 인명 표현방법 등에 윤색을 가하여 번안한 작품도 상당수에 이른다. 결국 활자본은 원작의 모습이 퇴색되면서 원작과 거리가 멀어진 작품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자료적 가치가 필사본이나 방각본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경향도 보인다.
결론
우리나라 고소설은 한문소설로 존재하는 작품도 있고 한글소설로만 혹은 한문과 한글이 함께 공존하는 작품도 있다. 표기형식에 따라 이렇게 나눠졌으며 그것은 인쇄라는 방법으로 하여금 독자들에게 전달 될 수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표기방식에 따른 분류의 특징들이 향유계층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로 볼 때 그 나름의 의미도 파악 할 수 있었다. 상층양반이 중심이 된 한문 해독층에서 하층 민중 사이까지 독자의 범위가 넓어졌고 동시에 한문소설과 국문소설을 통해 각각의 취향과 세계관을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필사본으로 시작되었던 소설을 활자를 이용한 인쇄 때문에 손쉽게 제본할 수 있어서 이로 인해 우리나라 소설의 상업적 면모를 실현 가능하게 한 점도 고소설의 전개양상에서 중요한 점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참고문헌>>
한국 고소설의 세계- 이상택 외, 돌베개.
고소설의 사적 전개와 문학적 지향- 반교어문학회, 도서출판 보고사.
우리 고소설 연구- 이복규, 도서출판 역락.
한국 · 중국 · 일본의 小說의 개념(趙東一, 省谷論叢 20, 1989).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고소설사 -김광순 국학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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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09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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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93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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