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혁명과 계몽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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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과학혁명과 계몽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2.1. 과학혁명의 배경과 전개
2.2. 주요 학문 영역에서의 과학 혁명
1) 천문학
2) 역학
3) 방법론
4) 그 외의 분야
2.3. 과학혁명의 의의
1)과학사적 의의
2)인류사적 의의
2.4.과학혁명의 문제점

3. 결론

< 계몽사상 >

1. 계몽사상
2. 계몽사상의 일반적 정의
3. 계몽사상의 전제들 (과학혁명과 로크의 영향)
4. 계몽사상가들
5. 계몽사상가들의 영향
6. 계몽사상의 쇠퇴와 의문점
* 서유럽과 독일 계몽주의의 차이점 *

본문내용

고 법과 정치학 분야에서는 벤담(1748-1832)이 공리주의에 입각한 사회이론을 확립하였던 사람으로, 공리주의란 효용이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가 각 개인의 행위의 동기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상이다. 이 공리주의에 의하면 모든 사회과학의 목적은 최대다수의 개인들의 최대행복을 증진시키는데 있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통계학에 있어서는 런던의 부유한 장신구상인 그런트(1620-1674)의 사망통계자료나, 페티(1623-1683)의 과세통계를 수집함으로 근대적 통계학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5. 계몽 사상가들의 영향
18세기 큰 업 중의 하나는 과학의 방법을 인간과 사회의 이해에 적용한 것이었다. 즉 만일 과학자들이 자연현상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면, 동일한 방법에 따라 인간과 사회의 현상도 법칙적으로 설명될 수 있으리라고 믿게 되었다. 18세기 사람들의 깊은 관심대상은 인류의 복지 내지 인도주의였다. 오류를 줄이고 행복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그러한 관심은 결과적으로 체계적인 사회연구를 낳게 하였으며, 정치학, 경제학, 인류학, 심리학을 비롯하여, 특히 범죄학, 교육 등의 분야에 큰 진보를 낳게 했다.
이러한 계몽사상은 결국 유럽에서 세속주의의 정신을 조장하였다. 지적 발전은 사람들을 낡은 종교로부터 방향을 돌리게 할 사회적, 경제적 요인을 강화하였다. 교회와 성직자들은 주도권과 위엄을 잃었다. 이제 경제학과 정치학, 기업과 국가는 종교적 목적에 순종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도덕적 또는 종교적인 비판으로 인해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고 동시에 종교적 관용이 널리 퍼져 나갔다. 종교적 소수파에 대한 박해가 드물어지게 되었다. 교회가 교리의 수락을 강요할 경우에도 종전의 야만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게 되었다. 또한 피의자나 정치범들에게 국가가 사용하던 잔인한 방법도 점차 비판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계몽 사상가들은 사회의 개혁 특히 형법개혁, 노예제 폐지, 교육보급을 요구하고, 또는 국제 평화의 보장 등을 주장하여 당시대의 각국 군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사상과 시책은 한편으로 이른바 18세기의 계몽 군주들의 개방된 개혁태도에 의해서 받아들여지고, 다른 한편으로 일반 대중의 저항정신에 호소하게 되었다. 계몽 사상가들은 결코 권위와 전통에 대한 항거에 있어서 폭력과 혁명을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일반대중은 혁명의 합리화를 계몽사상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계몽 사상가들의 생각이 어느 만큼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 힘으로 작용했는가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혁명의 배경에 계몽사상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6. 계몽사상의 쇠퇴와 의문점
계몽사상 운동이 진행될수록 그 자체에 쇠퇴 요인이 있음이 분명해졌다. 이신론은 점차 위안과 구원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또 추상적인 이성을 너무 강조함에 따라 반대되는 정신이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뒤에 낭만주의로 알려진 문화운동에서 보여 지듯이 흥분과 감동의 세계를 찾았다. 프랑스 혁명을 뒤이은 공포시대는 과연 인간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진보의 역사라고 하는 계몽사상 특유의 낙관론은 계속 살아남아 계몽사상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계몽 사상가들에 대한 몇 가지 의문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첫째로는 계몽 사상가들이 대중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 엘리트주의자들에 불과한가 하는 것이다. 18세기 전체에 걸쳐 대다수의 하층민들은 문맹이기에 대부분의 계몽 사상가들의 청중들은 귀족, 법률가, 정부 관리, 부유한 상인, 그리고 소수의 고위성직자였다는 것이다. 계몽사상은 대중 신앙에 미신이란 요소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놀라운 영향을 준 것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며, 대다수의 계몽 사상가들이 명료함을 공언했지만, 대부분의 노동대중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쓴 것도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계몽 사상가들이 '행동가'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비현실적 몽상가'가 아니었을까 하는 점을 들 수 있다. 계몽사상이 유토피아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고, 지나친 낙관주의적 경향이 다분했다. 그들은 사회개혁에 있어서도 점진적으로 계몽과 덕성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로 도달할 것이라고 지나치게 믿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서유럽과 독일 계몽주의의 차이점 *
서유럽의 계몽주의는 '자연철학적, 이성적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새로운 과학과 철학의 발전은 중세 교회의 보편적인 질서에 문제를 제기했다. 서유럽의 계몽주의는 인간의 삶의 전 영역에서 신의 그림자들 지워가고 인간의 이성에 대한 자각을 통하여 무신론적 경향을 띠고 있었으며 이러한 입장에서 교회에 대하여는 적대적 입장에서 무차별적 공격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계몽주의는 다른 서유럽의 계몽주의와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독일 계몽주의는 서유럽이 이성과 계시를 극명히 구분하거나 계시를 부정하는 것과는 달리 이성과 계시가 서로 조화되고 보완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독일의 계몽주의는'신학적 계몽주의'라고 할 수 있다. 독일 계몽주의는 경제적으로 퇴보된 현실을 발전시키기 위한 운동으로 출발했다. 이것은 종교적인 면에서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과 그 시대를 같이 하는데 그러한 까닭에 실제적인 개혁 운동으로서 자리매김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 네이버 백과사전
-네이버지식인검색 (http://aped.snu.ac.kr/cyberedu/cyberedu2/kor/kor24-03.html)
- 네이버 블로그
(http://cafe.naver.com/akandra.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61)
- 민석홍, 서양사 개론, 삼영사,
- 박무성, 서양근대사 총론, 법무사, 1992
- 한국브리테니커, 브리테니커 세계대백과사전 1, 한국브리테니커 회사, 1992
- 손영운, 청소년을 위한 서양과학사, 두리미디어, 2004
- 천병수, 자연과학 개론, 청문각
- 김영식, 과학혁명 : 전통적 관점과 새로운 관점, 아르케, 2001

키워드

과학,   혁명,   계몽,   사상
  • 가격2,0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7.02.16
  • 저작시기2007.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95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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