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辛亥革命) - 중국의 근대화 운동 (양무운동 ,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손문의 삼민주의와 중국 동맹회,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 중국 근대화 실패의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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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해혁명(辛亥革命) - 중국의 근대화 운동 (양무운동 , 변법자강운동) 신해혁명 (손문의 삼민주의와 중국 동맹회,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 중국 근대화 실패의 원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중국의 근대화 운동
  1) 양무운동 (洋務運動)
  2) 변법자강(變法自彊)운동
 2. 신해혁명(辛亥革命)
  1) 손문의 삼민주의와 중국 동맹회
  2)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
 3. 중국 근대화 실패의 원인
  1) 자연과학의 부재
  2) 문화적 우월성의 과신

Ⅲ 결 론

참 고 문 헌

본문내용

자본주의의 ‘발전체계’가 결여되어 있었던 원인을 중국 사회를 지탱해 온 가치체계인 儒家윤리로 규정하였다. 그는 사대부를 儒家윤리의 사회적 체현자로 파악하였다. 그가 보기에 儒家의 관심사는 현세주의적인 것이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기초도 없고, 인간관계 이외에는 어떠한 엄숙한 관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와 인간의 근본적인 구조는 화해적이고 평행적이다. 따라서 우주와 인간사회의 질서에 대한 유학자들의 시각에는 ‘강렬한 현세적 낙관주의’가 내재해 있으며, 인간은 선한 존재이므로 서양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 ‘원죄’의 관념이 존재할 리가 없다. 더욱이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서 완전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베버는 儒家를 하나의 ‘이성적 윤리’로 보았는데 그것은 순전히 외부세계에 대한 儒家의 낙관적 입장이 인간과 세계와의 긴장성을 엄청나게 감소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는 기독교 윤리 속에서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긴장성’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儒家윤리에서는 자연과 신성, 윤리적 욕구와 인간의 불완전함, 원죄의식과 초월적 구원에 대한 욕구, 현세에서의 행위와 내세에서의 보장, 그리고 종교적 책임과 사회정치적 현실 사이에 어떠한 긴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베버의 견해에 의하면 儒家들이 세계에 대한 긴장성을 결여하게 된 원인은 儒家윤리 중에 어떠한 초현세적 절대자의 윤리적 예정도 없으며, 그에 따라 현실세계에 대한 윤리적 개혁 요구가 제시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고 한다. 나아가 베버는 긴장성의 결여로 인해 儒家들 개인들에게는 어떠한 내부적인 도덕적 노력도 결핍되어 있으며, 그것은 ‘본래 죄를 가지고 있다고 간주되는 본성에 대한 체제적인 통제’에 힘을 쏟는 프로테스탄트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동시에 그는 儒家들에게 어떠한 ‘자주적 윤리’, 혹은 어떠한 ‘가치의 내재적 기준’, 혹은 어떠한 ‘세계와 대립하는 자주적인 대항력’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베버는 중국인들이 자기를 통제하고 세계를 통제하는 일종의 자발적이고 내재적인 역량을 가지고 있는 프로테스탄트들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儒家윤리와 기독교윤리는 모두 이성주의를 근거로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성주의는 완전히 상이한 정신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儒家의 이성주의는 세계에 대한 이성의 적응이며, 기독교의 이성주의는 세계에 대한 이성의 주재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儒家윤리에 대한 베버의 기본관점이며, 또한 儒家윤리가 사회경제적 질서의 변혁을 좇아 근대화를 낳지 못했던 근본원인으로 그가 지적하던 바였다.
Ⅲ 결 론
지금까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응한 중국의 근대화 운동의 내용과 한계성 그리고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성립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것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이러한 사건들이 주는 역사적인 사실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타산지석을 삼을 수 있는 좋은 지표가 되어준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중국에서 나타나는 자연과학의 부재에 따른 파생된 문제를 많이 접해보았다. 우리나라 또한 유교적 사상이 지배적인 국가에서 실학사상이 자리 잡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주요 기술 종주국이 되지 못한 동양문화권의 국가들이 해결해야할 과제들을 다시 상기해주고 있다.
신해혁명의 최대의 성과라고 일컬어지는 2천년 이래의 전제지배체제의 타도와 민주공화제의 수립이나 거기에 수반된 새로운 정신적사상적 해방은 비록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신해혁명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이 많다. 그것은 신해혁명의 혁명적 성격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로서 신해혁명은 반식민지반봉건적 여러 세력들이 사회의 기본 틀을 변경함이 없이 부르조아적 요소를 위로부터 포섭함으로써 봉건적 지배의 재편을 꾀하는 단순한 정치적 변혁이라는 것이다.
<중화제국 국제관계사>의 말미에서 저자 ‘모스’는 “청조가 무너진 자리에 들어선 공화국에게 청조는 혼란과 부패한 행정 그리고 열강에의 종속이라는 유산을 물려주었다.” 고 하였다. 즉 “청말 변혁에서의 변혁의 내용은 혁명이 아니며, 반 식민지적 반봉건적 여러 세력이 현존체제에 기본적인 틀을 변경함이 없이, 더욱이 부르조아화를 지향하는 그들의 요구에 적합한 정치체제를 창출하려 한 부르조아적 개량 즉 부르조아적 요소를 위로부터 포섭함으로써 봉건적 지배의 재편을 꾀하는 식민지적 반봉건적 권력의 수립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변혁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물론 신해혁명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정을 만든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불완전 혹은 실패한 혁명으로 반봉건적인 청나라의 체제의 유지와 제국주의 국가들에 대한 실질적 부인이 없이 중화민국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혁명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변화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사회 전반적으로 모두 영향을 끼쳐야 진정한 혁명이라고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신해혁명의 실패한 측면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역시 과거에서의 교훈은 얻을 수 없게 된다고 생각을 한다. 막연히 신해혁명을 위대한 손문이 주도하여 일으킨 혁명이라는 중국적인 시각의 관념적인 생각을 버리고, 조금은 객관적인 접근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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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근대중국민족운동사연구, 일지사, 1978
동양사학회. 개관 동양사, 지식산업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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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두기, 청대 봉건론의 근대적 변모 , 중국근대사연구, 서울 일조각,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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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1.01
  • 저작시기2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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