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의 의산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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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홍대용의 의산문답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홍대용 연보

Ⅱ. 홍대용의 사상
-자연관, 주체적 세계관, 경세론, 신분제 및 교육제, 과학사상

Ⅲ. 「의산문답」작품 개관
-저작시기,「의산문답」의 주요 내용
등장인물
장르적 성격
「의산문답」의 구성과 주제의식
「의산문답」의 표현양식

Ⅳ. 「의산문답」에 나타난 사상
-주자학(朱子學) : 주기(主氣)론적 입장
인물지성(人物之性) : 이천시물(以天視物)
천지지정(天地之情) : 지원설, 자전설, 무한우주설
인물지본(人物之本) ․ 고금지변(古今之變)
화이지분(華夷之分) -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

본문내용

불과하다는 것이다. 홍대용은 이를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고찰하고 나아가 주체성을 확립하는 역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공자가 『춘추(春秋)』를 지은 본의를 설명하고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을 통해 국가의 상대적 자기중심성을 확인함으로써 번방의식(藩邦意識)을 극복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역외춘추론은 결국 우리 역사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과 더불어 모든 국가를 대등하게 인식하도록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홍대용의 철학사상은 과학적 사유에 의한 중세기적 사고의 틀을 벗어나 비로소 근대적인 사유가 가능하였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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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대용이 살았던 시기
홍대용이 살았던 18세기 조선은 왜란과 호란을 겪은 지 100년도 훨씬 지났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급변하는 시기였다. 농토의 증가와 함께 이앙법의 보급으로 수확량이 늘어났지만 그러한 혜택은 지배계층인 양반과 일부 소수의 자영농에게 대부분 돌아갔기에 농민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더욱이 이앙법의 보급은 농업에 있어서 노동력의 감소를 가져와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야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또한 선조 이후 지방의 특산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대동법과 농민들의 도시 이주로 상업이 발달하였다. 하지만 정부에 특산물을 공급하던 도고의 전매로 인해 물가가 오르는 등 영세한 상인들의 어려움은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정치권은 변화하는 당시 사회의 요구를 뒤로한 채 여전히 정권다툼에 여념이 없었고, 업신여기던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우자 성리학으로 더욱 무장하며 명분 없는 중화사상에 빠져있었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데 당시 개혁의 주체인 기득권층인 양반 지배세력은 주자가 풀어놓은 문구나 외면서 자신들의 이권을 더욱 철저하게 다져나갔다.
30년 동안 공부를 하며 성리학으로 무장한 허자가 세상을 나와 실옹을 만났지만 호되게 꾸지람을 받는다. 열심히 공부는 했지만 가식과 위선에 쌓인 허자의 언행은 그야말로 헛됨 그 자체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기득권층인 양반지배세력이 비판과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성리학이라는 낡은 의식에서 벗어나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홍대용의 개혁의 출발은 바로 낡은 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당시의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은 다른 만물보다 더 지혜로운 존재였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엄연한 서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홍대용은 사람과 천지만물은 똑같은 존재라는 인물균(人物均)사상을 내세우며, 기득권층의 우월적인 선택의식과 함께 신분제도가 사라져야 세상이 밝아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구는 둥글고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월식을 보고도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모른다면 거울을 보고도 자기 얼굴을 분간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어디든 자기가 사는 세계가 정중심의 세계라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실제 보이는 것도 부정하면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자신의 이권을 위해 뻔한 사실도 부정하며 합리화하는 당시의 기득권층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기득권층들이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본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야한다는 지적이기도 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무한한 우주에 한낱 점으로도 표시할 수 없다면서 그런 지구에 사는 인간들이 부질없는 욕심에 빠져 사는 것을 비판했다. 이는 당시 양반 기득권층들이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어야 한다는 성리학적 근거를 부정하면서 그들의 끊임없는 욕심과 야욕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천체를 과학적으로 규명하면서 천재지변을 음양오행과 연관시켜 자연현상과 인간행위를 연결시킨 재이설을 부정하였는데, 이 또한 헛된 것과 허망한 말로 세상을 기만하지 말라는 진정한 충고이기도 했다.
자연의 현상을 자세히 설명하고 당시의 장례문화의 헛됨을 지적했다. 이는 자연현상에는 그 법칙이 있듯이 자연스럽게 세상의 이치를 순응하면서 살아갈 때 올바른 변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당시 사회상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는 세상과 자연의 이치를 음양과 오행으로 보는 성리학적 입장을 부정하는 것으로써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야 개혁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잘못된 장례문화를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와 주변 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설명하면서 중국 한족의 문화를 중심으로 보는 화이관을 부정하였다. 이는 당시 기득권층들이 업신여겼던 만주족이 세운 청의 문화는 부정하면서 명나라 멸망 후 명분만 내세우며 중국의 전통 유학을 조선이 이어받았다는 소중화의식에 빠져 있음을 비판한 것이었다. 즉, 중국과 오랑캐의 구분이 없다는 역외춘추론을 주장하며 주체적인 역사의식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주체적인 역사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현실적으로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여야 부국강병을 할 수 있다는 홍대용의 간절한 의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의산문답」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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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국실학사상사』, 다운샘,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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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2.20
  • 저작시기20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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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9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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