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사 총정리 (경제학파별 + 경제학자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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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사 총정리 (경제학파별 + 경제학자별)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경제학사의 계보
1. 중상주의 (重商主義 mercantilism)
2. 중농주의(重農主義 physiocracy)
3. 고전학파 (古典學派 classical)
4. 역사학파 (歷史學派 historical school of economics)
5. 마르크스 경제학 (Marxian economics)
6. 한계효용학파 (限界效用學派)
7. 케임브리지학파
8. 케인즈학파 (Keynessian school)
9. 제도학파 (制度學派 institutional school)
10. 통화주의 (通貨主義 monetarism)
11. 신고전학파 (new classical school)
12. 공급측면 경제학 (供給側面經濟學 supply side economics)

Ⅱ. 경제학사의 경제학자별 총정리

본문내용

'자본부족' 이었다. 이의 해결을 위해 스탈린은 활용 가능한 자원과 인력 가운데 가능한 한 많은 양을 중화학공업에 우선적으로 쏟아 붓고 나머지를 소비재 생산에 투입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생필품소비재의 부족사태가 일어났다. 현재 소비의 절제는 언제나 대중의 생활고를 낳는다. 이것은 분명 일종의 강제저축임에 분명하고 또 대중에게 커다란 생활상의 불편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소련의 지도자들에게는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것이 공산주의적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치러야 할 대가라고 인민을 설득했다.
스탈린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를 완전히 철폐했다. 모든 생산시설과 원료를 국유화하고 자본가 계급의 존재를 말살했다. 기업을 경영하고 생산 활동을 지휘하며 생산물을 처분하는 일체의 권리는 소련 공산당과 정부의 관료들에게 맡겨졌다. 그들은 실질적으로 자본가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본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며 그들의 권리는 상속되거나 증여될 수 없었다.
스탈린은 또 생산의 또 다른 요소인 토지의 소유권도 부정했다. 스탈린은 농업부문에서도 사회주의적 생산관계를 확립하고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모든 경작지를 거대한 집단농장으로 개조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암흑의 시대'였던 것만은 아니다. 사회주의 건설 초기의 소련 사회는 분명 "이기심에 지배되는 쾌락주의적 개인의 산술적 집합체"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류의 미래가 걸린 그 '위대한 실험'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행복한 미래에 대한 확신'이 무수한 난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독일이 소련을 침략했을 때 소련은 혁명 후 처음으로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불과 20년 동안에 그 나라는 "낡은 전제정치 아래서 신음하는 후진 농업국"에서 이미 "히틀러와 현대전을 감당할 수 있는 강력한 농업국가"로 탈바꿈해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는 철폐되었다. 또 자본주의의 가장 큰 병폐가 계급간의 경제적 불평등이었던 만큼 사회주의 정부는 임금을 거의 평준화시킴으로써 경제적 평등을 이루었다. 혁명정신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경쟁이란 일시적으로 또는 일부의 사람들을 매료시킬 수는 있었지만, 모든 사람을 언제까지나 일에 붙잡아 맬 힘은 갖고 있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아무래도 빈둥거리는 쪽을 택하기 쉬운 것이 인간인 법이어서 많은 노동자들이 적당히 일하고 술이나 퍼마시는 무기력한 일상에 젖기 시작했다. 미하일 고르바쵸프는 기술적인 요소보다는 '인간적인 요소'가 생산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리고 무조건 똑같은 임금을 지급할 경우 사람들이 열심히 잃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나아가 그는 생산물을 처분할 권리를 기업 스스로가 행사하고 노동자들이 기업 경영에 책임성 있게 참여할 수 있어야만 생산의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시장은 자본주의 사회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 시장에 존재하는 모든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인 것도 아니다.
물론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로 발전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모든 지배적 사회제도를 혐오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사유재산제도와 더불어 시장의 필요성까지도 부정해 버렸다.
시장의 폐지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존립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시장이 존재하지 않으면 소비자의 요구와 생산자의 판단이 괴리를 일으키게 된다. '가격'이 재화의 사회적 '가치'와 동떨어진 존재로 되면서 기업경영도 심각한 악영향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생산의 효율성을 측정할 기준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시장이 폐지되고 가격이 고유한 기능을 상실해 버린 소련경제에서 생산 활동의 성과를 측정하는 유일한 기준은 기업의 총생산고 뿐이었다. 그래서 아래로는 개별 노동자로부터 위로는 거대 국영기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산 활동의 목표는 상부에서 결정한 노르마, 즉 생산할당량을 초과 달성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같은 '총생산고 제일주의'가 반세기 넘게 경제활동을 지배하면서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총생산고 제일주의'가 소련 경제를 질식시키고 있음을 통감했다. 그리고 당시 이미 본격적인 단계에 접어든 자본주의 선진국의 '과학기술 혁명'은 그러한 위기의식을 한 단계 더 증폭시켰다.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고, 공산당이 국가기구를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모든 권력이 공산당의 지도부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소련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소수자에 대한 다수자의 독재이므로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모토아래 어떠한 정치적 반대세력의 존재도 허락하지 않는 완전한 일당 독재를 실시했다. 공산당은 모든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자신의 손아귀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여기에 스탈린이라는 무자비한 독재자의 숨결이 곁들여졌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몰락은 스탈린의 시기에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소련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지나친 나머지 시장의 기능을 원천봉쇄해 버렸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경제 권력과 정치권력을 모두 공산당이 독점하고, 또 현존체제에 대한 모든 비판을 반역죄로 단죄하는 경직된 공포정치를 실시한 탓으로, 그러한 내적 모순이 해결될 수 없었던 것은 더 큰 비극을 초래하였다.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 정책을 실시하여 소련 사회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개방해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70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온 스탈린주의 체제의 유산은 순조롭게 청산되지 않았고, 거기에다 보수파의 쿠데타가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무사히 크레믈린으로 복귀하였지만, 조심스럽게 추진해온 그의 개혁정책은 파산해 버렸다.
한때 고르바초프의 가장 가까운 개혁파 동지였던 보리스 옐친은 보수파의 쿠데타에 대한 민중의 반대에 편승하여 연방 해체의 폭풍우를 몰고 왔다. 공산당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고르바초프는 연방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소련이라는 거대한 국가는 먼저 붕괴해버린 유럽의 사회주의와 함께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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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8페이지
  • 등록일2007.02.22
  • 저작시기200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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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96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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