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미술감상법 -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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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a+]미술감상법 - 남한산성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요

2. 4대문
① 동문(左翼門)
② 서문(右翼門)
③남문(至和門)
④ 북문(戰勝門)

3. 성곽

4. 여장

5. 옹성

6. 돈대

7. 포루

8. 수구

9. 치

10. 장대

11. 지정 문화재
① 숭열전
② 망월사
③ 행궁 (경기도 기념물 제 164호)

12. 자연환경

13. 병자호란

14. 맺음말

본문내용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더 이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게 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다시 강화론이 대두되었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다시 한 번 심한 논쟁을 벌였고, 주전파가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군 진영에 화의를 청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이 국서를 작성하고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이 직접 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맹세하고 척화 주모자 3인을 결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내용이 너무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인조와 대신들은 청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서 다시 수일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 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가 전달되자 인조는 별 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인조가 출성하여 항복할 결심을 굳히자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 등은 적진을 왕래하며 조선 측의 항복 조건을 제시하고, 청군 진영에서는 용골대, 마부대 등의 사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회담에 응하였다. 조약서에 명시된 청의요구 사항은 총 열한 가지였다.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갖추는 한편 명과의 교호를 끊을 것, 청에 물자 및 군사를 지원할 것, 청에 적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말고 세폐(공물)를 보낼 것 등이었다.
조약이 체결되자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나가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신하의 예를 갖춘 뒤 한선으로 되돌아왔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는데, 이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일본에게 패할 때까지 계속된다.
청은 철군하면서 소현세자, 빈궁,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을 볼모로 삼고 미리 유치하였던 척화론자 오달제, 윤집, 홍익한을 심양으로 끌고 갔다. 청군은 조선에서 철수하는 도중에 단도의 동강진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 때 청 태종은 패륵 아탁과 항복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 등으로 하여금 병선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선측에서도 황해도의 병선을 지원했다. 또한 항복 조건에 따라 평안병사 유림을 수장으로 하고 의주부윤 임경업을 부장으로 하여 청군을 도와 싸우도록 하였다. 이 싸움에서 임경업은 척후장 김여기를 몰래 보내어 명제독 심세괴에게 피하도록 알렸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싸우다가 끝내 전사하였다.
청군에 의한 군사적 피해 못지않게 민간의 피해도 막심했다. 청군은 도적질을 일삼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철군하면서 50만에 달하는 조선 여자들을 끌고 갔는데, 이들의 목적은 끌고 간 여자들을 돈을 받고 조선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끌려간 여자들이 대부분 빈민 출신이라 속가를 낼만한 입장이 못 되었다. 그러나 비싼 값을 치르고 아내와 딸을 되찾아 오는 경우도 꽤나 많았는데, 되돌아온 환향녀들이 순결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혼 문제가 정치, 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병자호란을 통해 이러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된 것은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 사대주의에 빠져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살렸더라면 변란은 물론이고 그동안 중국과 맺어오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을 신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을 것이다.
14.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남한산성은 유구한 역사 속에 산 증인으로서 우리들 곁에 있다. 병자호란이란 전란 속에서 우리를 지켜주던 곳으로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기도 하였지만 남한산성은 마지막 보루가 된 곳임에는 틀림없다. 성남에서 살아가면서 초, 중, 고 시절 봄소풍으로 아무 생각을 가지지 못하고 다니던 산이 우리의 역사를 가지고 또한 역사 속의 보물들과 운치 있는 자연환경을 가진 곳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산을 올랐던 소풍으로만 즐거웠던 것이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지만 지금에 와서라도 남한산성이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는 사실만을 안 것으로도 나에겐 이번 조사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젠 남한산성을 오르면서 단지 약수를 길기 위한 것만이 아닌 남한산성의 역사를 알게 된 만큼 그 유적지들 속에 남아있는 그 시대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맡아보려 노력해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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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7.04.05
  • 저작시기2007.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0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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