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초기 왕권과 호족의 갈등(이흔암, 환설길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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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환선길과 이흔암의 반란
918년 6월 병진일
청주호족
왕순식

본문내용

귀시켜 전선으로 내 보냈는데, 지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유금필은 백제군을 격퇴하고 신라를 구원했다. 그는 여진족 기병부대를 포함하여 언제나 최고 정예부대를 지휘했으며, 땅과 바다에서 맹활약을 했다. 후백제를 멸망시킨 5년 후인 태조 24년에 사망했다.
왕순식
왕순식은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의 호족 출신 장군이다. 그의 본래 성은 김씨이며, 왕씨 성은 후에 고려 태조 왕건이 그에게 내린 성씨이다.
그는 명주(강릉)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신라 선덕왕의 뒤를 잇는 왕위 다툼에서 원성왕에게 패배하고 이 지역에 내려 온 김주원과 관계가 깊은 신라의 진골 가문으로서 명주 일원의 세력가였다. 통일신라 말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각 지방 세력가인 호족들이 일어나자, 김순식은 스스로 명주 장군이라 칭하고 독자적으로 명주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다.
명주는 고구려의 땅이었을 때에는 하슬라주로 불리웠다가, 신라 내물왕대(356~402)에 신라의 땅이 되었는데, 해안을 따라 쉽게 신라의 서울 경주에 닿을 수 있는 위치 때문에 일찍부터 군사적 중심지가 되었다. 경덕왕 16년(757)에 명주로 이름이 바뀌었고, 후에 김주원 세력이 내려와 살면서 이 지역에 그 세력을 떨쳤다.
이후 진성여왕 8년(894)에 궁예가 북원의 양길로부터 나누어 받은 군사로 명주를 점령하였다. 이 때, 김순식을 비롯한 명주 세력이 궁예를 물리칠 수 없었던 것은 아니고, 김순식 등과 마찬가지로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는 이전부터 명주 지역과 연결되어 있어, 이들이 군사적인 협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궁예는 명주 지방 세력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늘어난 군사력을 기반으로 895년에는 명주로부터 해안을 끼고 북쪽으로 올라가 영서로 넘어와 철원 등 10여 군현을 점령함으로써 그의 세력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었고, 마침내 896년에 철원에 도읍을 정할 수 있었다. 이처럼 궁예가 태봉을 건국할 수 있었던 정치적 군사적 힘은 바로 김순식의 명주 지역의 도움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김순식의 아버지로 스님이었던 허월은 이 때 궁예가 명주에 왔다가 다시 정복을 떠날 때 함께 가서 왕도에 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김순식은 이러한 궁예와의 관계로 인해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 후에도 오랫동안 왕건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왕건은 명주 일대의 그의 군사적 가치를 높이 보고 그를 고려에 복종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걱정하니, 유권열이 아버지가 자식을 타이르는 것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순식의 아비 허월 스님이 내원(궁 안에 세워진 절)에 있으니 그를 보내 타이르도록 하소서.하니 태조가 이 말을 따라 태조 5년(922) 허월을 보내 순식을 설득하게 하였다.
이에 순식은 먼저 맏아들 수원을 보내 고려에 따를 뜻을 전하였다. 왕건은 수원을 맞이해서 왕씨 성을 내려주고 집과 땅도 주었다. 이처럼 왕건이 순식을 위해 애쓰자, 순식은 태조 10년(927)에는 아들 장명과 군사 600인을 개성에 보내 왕실을 지키게 하고, 이듬해에는 드디어 자신이 무리를 이끌고 와 왕건에게 완전히 복종하였다. 왕건은 그에게 왕씨 성을 내려주고 최고 벼슬인 대광을 내려주는 등 크게 대우하여 맞이하였다. 또 아들 장명에게도 염이라는 이름과 벼슬을 주었고, 순식의 부하인 관경과 왕예에게도 왕씨 성과 벼슬을 주었으며 그들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그 결과 고려는 강원도 지역 깊숙이 세력을 미칠 수 있었고, 군사력 또한 한층 강하게 되었다.
태조 19년(936) 왕건이 후백제왕 신검을 공격할 때에 왕순식은 명주로부터 왕렴왕예 등 지휘관과 군사 2만명을 이끌고 고려군에 가담하여 일리천(지금의 경북 선산 지방)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이로써 후백제의 신검이 항복하여 후삼국이 통일되었다.
왕순식은 명주에서 독립적인 힘을 갖고 있던 호족으로, 먼저 궁예와 맺었던 관계 때문에 태조 왕건에게 오랫동안 복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과 왕실의 안정을 위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던 왕건이 호족들을 힘으로만 복종시키려 하지 않고, 그들에게 왕실과 같은 왕씨 성을 주고, 혼인을 맺어 그 관계를 가족으로 가깝게 하는 정책을 펴고, 그들에게 벼슬을 주어 관리로 받아들이고, 그 지방의 통치를 맡기는 등 여러 가지로 설득하고 협조를 구해 고려에 복종하도록 노력하였다. 이러한 태조의 노력에 왕순식과 같은 호족들이 뜻을 같이하여 도움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여 민족의 완전한 통일을 이루고, 호족세력들은 고려의 통치를 받게 되어 새로운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키워드

이흔암,   환선길,   청주,   태조,   호족,   왕건,   왕순식,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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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01
  • 저작시기200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2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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