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숭배와 신사참배, 그리고 숭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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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황제숭배와 신사참배, 그리고 숭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I. 들어가는 말

II. 로마의 황제숭배
1. 황제숭배
2. 황제숭배와 기독교

III. 일본의 신사참배
1. 신사참배와 조선
2. 신사참배와 조선의 기독교

IV. 황제숭배와 신사참배, 그리고 숭실

V. 나오는 말 -숭실의 재건자 한경직을 중심으로-

본문내용

이일로 인해 숭실학교의 '조지 S 매퀸'교장(한국명 윤산온)은 다음 해인 1936년 1월 20일 파면됐다. 동아일보 1982년 8월 16일. '혹독했던 신사참배 강요' 김두찬
이어서 윤동주 평전의 저자 송후혜는 숭실의 폐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윤산온 교장의 후임으로는 숭전 교수이던 정두현이 취임했으나, 1936년 4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학생들 중에서 큰 소요가 있었다. 일제 당국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한 결과 희생당한 윤산온 교장에 대한 애정과 공감, 그리고 일제 당국의 부당한 압박과 횡포에 대한 저항의 수단으로 동맹퇴학을 감행하는 학생들까지 나왔다. 윤동주, 문익환등도 이때 함께 자퇴하였다.
이런 갖가지 아픔속에서 표류하던 윤동주의 모교 숭실은, 1937년 10월 29일에 제출한 폐교원이 1938년 3월 19일에 일제 당국에 의해 수리됨으로써 40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다. '신사참배냐, 폐교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한 일제의 비열한 폭력 앞에서, 숭실과 숭의의 경영주인 북장로교 선교부는 차라리 폐교로써 종교적 순결을 지키기로 결단했던 것이다. 송후혜, 『윤동주평전』
이글은 숭실폐교의 주역이 학생들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학교의 경우, 학생들의 배울 권리를 지켜준다는 명분으로 학교의 대표들만 신사참배를 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숭실의 학생들은 윤산온 교장과 교계 지도자들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가르침을 받았던 것이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면 폐교를 시키겠다는 힘의 논리 앞에서 그들은 순전하게 예수처럼 십자가에 달리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외적으로는 죽음의 모습이었지만 황제숭배와 신사참배의 교훈이 보여주듯이 다시 사는 방법이기도 했다.
V. 나오는 말
-숭실의 재건자 한경직을 중심으로 『한경직 평전(조성기)』,『영락교회50년사』,『숭실대학교100년사』,『아름다운사람 한경직(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에서 참고하였습니다. 한경직 목사와 숭실 재건을 연결한 글들이 전무하지만, 실증적 사례를 토대로 인문학의 위기를 돌파한다는 의미를 갖고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연결시켜 보았습니다.
-
“먼저 나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나는 신사참배를 하였습니다.”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상 수상 기념예배(1992년)때 ‘숭실의 재건자’ 한경직 목사가 처음 한 말이다. 한경직 목사는 50년 동안 가슴에 묻어두고 있었던 말을 한 것이다. 신사참배의 허물을 공식적으로 회개하였던 것이다. 1938년 9월 9일 신의주 제2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던 그는 총회의 신사참배 제안에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그때의 침묵이 그의 마음에 50년 동안 ‘빚진’마음을 품게 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교한 사람들을 위해 순교자기념관을 짓는 일에 매우 적극적으로 모금활동을 했다.
그런데 같은 해(1938년), 그의 모교인 숭실은 수년 동안 끈질기게 신사참배에 반대하다가 일본정부의 정책에 맞서 ‘자진폐교’를 결정한다. 자신에게 신앙과 학문을 가르쳐 준 숭실이 ‘우상을 숭배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폐교를 당한 것이다.
이른바 ‘숭실대학 폐교사건’은 아마도 한경직 목사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후 그는 여러 동문들과 함께 1945년 해방이 되자마자 숭실의 재건을 위해 힘쓴다. 그러나 결국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재건의 계획은 좌절되는 듯 하였으나, 1954년 드디어 숭실대학을 재건하여 초대학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분명 숭실에 대한 애착과 ‘빚진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학교로 쓸 건물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담임목사로 있던 영락교회 건물을 임시건물로 쓰면서까지 죽은 숭실을 되살려야 했던 그 열정과 사명이 신사참배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회개행위였다.
그래서 신사참배 때문에 폐교당한 숭실을, 신사참배를 한 숭실인 한경직 목사가 재건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한경직 목사가 신사참배의 죄를 회개할 당시 그는 한국 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한국 교계에서 힘의 논리를 사용할 수 있는 지도자 중에 한명 이었지만, 힘의 논리와 결별을 선언하기 위하여 자신의 죄를 온 천하에 공중파를 타서 보낸 것이다.
로마의 황제숭배정책과 일본의 신사참배정책에 맞선 기독교인들은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들은 힘의 논리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는 반야훼적인 악의 실체에 맞서 죽임을 당하거나 핍박을 당했다. 그러나 박해가 끝난 이후에 그들은, 그들이 대항했던 그 ‘힘의 논리’에 스스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분열을 의미했으며 마치 로마와 일본처럼 많은 이들의 생명을, 혹은 정신을 빼앗아가기도 했다. ‘한(do)것’과 ‘안한(do not)것’의 구분은 한 공동체 내에서 피아식별을 하게 만들었고 이것은 곧 그들을 ‘힘의 논리’에 빠지게 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여전히 그 역사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황제숭배와 신사참배, 그리고 그 외의 역사와도 소통할 것이다.
여성신학자 구미정은 오늘날 지배적인 세계질서, 곧 지배, 종속의 피라미드 관계를 지탱하고 고착화시키는 전통적인 가부장적 신학의 이름을 ‘람보신학’이라고 이름 짓는다. 이 신학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명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온갖 종류의 정복과 지배와 억압의 악행들을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구미정, 『이제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올리브나무, 2004.
황제숭배와 신사참배에 맞서 정치적, 종교적 억압을 극복한 기독교인들은 자기들 스스로도 람보신학에 빠져들고 말았고 이 신학의 사슬은 아직도 끊어지지 않았다.
한경직 목사의 ‘적극적 회개행위’인 숭실대 재건은 기존 힘의 논리 속에서의 피아식별을 흐릿하게 해주고 람보신학의 사슬을 끊어줄 청사진을 제공하였다. 그 시대의 최고의 힘을 갖고 있던 그는 힘의 논리를 내려놓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폐교 숭실이, 신사참배거부에 동참 ‘안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에 의해서 부활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여전히 ‘한 것’과 ‘안한 것’의 구분을 통해서 피아를 식별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는 ‘한 것’에 대한 기득권을 내려놓고, ‘안한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회개행위를 통한 ‘피아식별의 혼돈’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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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6.10
  • 저작시기2007.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4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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