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다산 정약용의 사상과 현대적 의의(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 다산 정약용의 교육사상, 신민본주의 사상,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 다산 정약용의 경제사상, 다산 정약용 사상의 현대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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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다산 정약용]다산 정약용의 사상과 현대적 의의(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 다산 정약용의 교육사상, 신민본주의 사상,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 다산 정약용의 경제사상, 다산 정약용 사상의 현대적 의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다산 정약용 약력
1. 수학시절(출생~1789, 28세)
2. 사환시절(1789~1800, 39세)
3. 유배생활(1801~1818, 57세)
4. 향거(鄕居)생활(1818~1836, 75세)

Ⅱ. 다산 정약용의 경학사상
1. 심성관
1) 기존의 성리학
2) 성
3) 심
4) 자주지권
2. 이기관
1) 우주관
2) 이
3) 기
3. 성경
4. 고증학

Ⅲ. 다산 정약용의 실학사상

Ⅳ. 다산 정약용의 교육사상
1. 효제자
2. 국학
3. 기예론
4. 아학편

Ⅴ. 다산 정약용의 사회신분제도 개혁사상

Ⅵ. 다산 정약용의 신민본주의 사상
1. 사회계약에 의한 국가․ 사회․통치자․법률의 성립
2. 백성의 천자․군주 교체권 승인
3. 아래로부터의 ꡐ순ꡑ과 위로부터의 ꡐ역ꡑ의 전치
4. 백성 대표에 의한 법률의 제정
5. 입헌군주제의 맹아

Ⅶ.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

Ⅷ. 다산 정약용의 경제사상

Ⅸ. 다산 정약용 사상의 현대적 의의

본문내용

자치제를 전제한 것이었다. 또 그의 신민본주의 사상은 지방자치제를 전제한 민주주의 사상의 맹아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정부터 그 위의 당정주장군주는 이정이 단위가 되어 뽑는 간접민주제의 요소를 가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인구의 다수 때문에 불가피하게 당정부터는 간접민주제에 의거하여 최종적으로 군주의 선출에 이르는 입헌군주제의 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는 이 ‘순’의 국가조직과 현실의 전제군주제의 ‘역’의 상태 사이에서 여러 가지 현실적 타협을 하면서 실천 가능한 개혁안을 모색한 것이었다.
Ⅶ. 다산 정약용의 정치사상
다산의 정치사상은 다산의 독창적인 사상이었다기 보다는 광범위한 지식 대중들의 생각을 그가 집대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완전한 자유민권사상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는 민권의식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그의 정치적 사상의 형성은 당시의 세도정치의 등장으로 정계에서 추방을 당해 유배지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농민들의 생활상을 구체적으로 묵도할 수 있었고, 현실에서 날카로운 비판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적 배경은 삼정의 문란과 농민의 流離沒落현상, 전정과 환상의 문란, 군정의 부패등이었고 그에게는 서학이 민권의식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다산의 정치사상은 原政에서 잘 나타나는데 먼저 토지구분을 건의하였다. 또 교통을 편리하게 하고 도량형을 균일하게 하여 물화의 유통과 교환을 촉진함으로써 지방 생산력의 불균등적 발전을 완화하게 할 것이며, 정치적 권리를 균등하게 할 것과 민의 근로의 평균화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원론에서 보이는 맹점은 정치적 평등을 경제적 평 등에 둔 것이다. 즉 國民皆勞를 수립하여 遊食, 生食의 무리를 없애는 균등한 분배를 주장한 것이다. 주로 그가 역점을 둔 것은 민생문제의 균등적 해결과 산업 각 부분 중 특히 농업의 발전에 치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의 견해에서 교육에 대한 균등을 빠뜨린 것은 그의 정치적 시각이 유교의 교화주의 즉 덕치주의 방면에 치우쳤고 근대 보통교육의 이상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저서 경세유포에서 보더라도 그의 정치사상은 부패한 봉건체제를 유지하려는 대책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건설을 지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그는 향리세습제를 폐지하고 인재본위로 등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통색의에서 인재를 등용하는데 있어서 모든 인재를 버리고 “서민을 버리고 증인을 버리고 관서와 관북을 보리고 관동과 호남의 절반을 버리고···············문벌좋은 수십家만을 등용하고 나머지는 버림받고 소외되어 자포자기, 비분강개하여 인재가 일어나지 않는다.”하고 매우 통탄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원정, 탕론에서 이론적으로 표현되었다. “牧이 民을 위하여 있는가”라고 그는 강력한 의문과 비판을 제시하여 官主民奴의 사상을 부정하고 민본제도를 주장했다. “아니다, 牧은 民을 위해서 있다.”고 해서 牧民官이 민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의 원목에서도 보이듯이 그는 광의의 목도를 실현할 것을 이상으로 하였고 곧 그 방도로 목민심서 48권을 저작하였다. 이 책은 지방관리의 목민술에 대한 귀감이 되었고 등사의 전포로 당파의 장벽을 돌파하였다. “민은 흙으로 밭을 삼는데 吏는 민으로 발을 삼아서 살을 긁어내고 골수를 부수는 것으로 농사를 삼으며 백성의 재물을 가렴주고하는 것으로 추수를 삼는다
흠흠신서는 목민심서의 자매편으로 30권이고 그 내용은 살인 및 死罪에 관한 수사, 심리 및 판결의 원칙, 방법 및 판결례들을 포괄한 형법론집이다. 여기에서 그의 법률학적 민권사상을 예감할 수 있고 장래의 법률국가를 짐작할 수 있다.
탕론은 원목의 자매편으로 중국의 역성혁명을 빌어 민권사상을 입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민권과 군권의 교체에 대하여 단순한 역사의 우연적 계기로만 이해하였다.
Ⅷ. 다산 정약용의 경제사상
다산의 경제사상은 먼저 중농경제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38세 곡산 부사로 있을 때 정조에게 올린 應旨論農政疎에 편농(便農), 후농(厚農), 상농(上農)의 3개조를 진술하였는데, 이는 농업 발전책을 중심으로 하여 농촌 미신풍 속의 타파, 과거제도의 개정, 광업의 통제 및 양민 병역법의 변경 등 제정책까지 논했는데, 이는 당시 국왕의 자문에 대한 답인 만큼 실현가능하였으며 종래 자연발생적인 영농방법을 과학적으로 또는 기술적으로 고쳐보려는 의도가 전편에 일관되어 있는 것은 그 시대에 뛰어난 제안이었다. 다산의 중농사상은 단순히 농업을 주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重農·上農 등과 같이 농민을 존대하자는 의미이다. 당시의 농민은 거의 노예화 되어 있었으며 踐農, 離農의 풍습은 극단에 처해있었다. 이에 그는 사농공상의 지위를 균등하게 대하고 농민을 한층 더 존재함으로써만 歸農과 力農을 보장할 수 있으며 遊食·離農의 악폐를 퇴치할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시의 환곡제에 대한 피폐를 청구영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피, 좁쌀 못 먹인 해에
무럽꾸리도 하도할샤.
陽德, 孟山, 酒이
永柔, 肅川 화냥년들이
저다 타 먹은 還上을
이늙은 내게다 물리라 하네
還上에 볼기 설흔 맞고
長利갑세 銅솟출 둑 떼어낸다.
사랑하던 女妓妾은
이월차리가 등미러 간다.
이하생략
Ⅸ. 다산 정약용 사상의 현대적 의의
다산은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토대로 그의 독자적인 교육사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육관은 현대적인 시각에서 고찰하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재고할 수 있다.
첫째, 새로운 학문을 통해서 사회의 구조를 개편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실용성에 입각해서 직업의식을 개조하려고 했으며,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둘째, 이러한 경향에 부합되는 교육제도를 확립함과 동시에 사회윤리를 쇄신하려고 했다. 또한 과거제도의 모순점을 개선하고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교육과 학문과의 관련을 통해서 해결하려고 하였다.
셋째, 새로운 인간관, 즉 평등사상에 기초한 근대적인 민권의식을 토대로 교육의 효과를 높이려고 했다.
넷째, 합리적인 사고의 틀 위에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여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자아의식을 심어주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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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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