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문화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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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야문화에 대해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가야의 명칭
2. 임나일본부설

Ⅱ. 본론
1. 가야의 성립
2. 가야의 경제
3. 가야인의 생활과 문화

Ⅲ. 결론

본문내용

하나는 고상가옥이다. 김해 부원동, 창원 가음정도, 진해 용원동 등에서 출토된 자료는 지상가옥보다 고상가옥이 많다. 고상가옥은 아래에 기둥으로 된 하부구조를 가진 것으로, 상부구조는 벽체시설과 지붕 등 일반 가옥의 형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날 한옥의 대청마루나 원두막에 고상가옥의 원래 모습이 남아 있다.
북방식인 수혈가옥과 남방식인 고상가옥이 만나서 전통한옥의 전형적인 구조가 만들어지는데, 수혈식은 온돌방으로, 고상식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었다. 전통한옥은 북방문화와 남방문화의 조화로운 만남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가야의 주택은 바로 이 전통한옥이 만들어지는 발전과정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d. 가야의 장송 의례
[삼국지]에는 ‘장송의례시 큰 새의 깃을 넣어서 죽은 자를 보내는데, 그 의미는 죽은 자가 잘 날아갈 수 있게 하고자 함’이라는 기사가 나와서 가야인들의 장례모습을 보여준다.
무덤 안에 음식과 그릇을 부장하는 풍습은, 규모의 대소와 수량의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가야시대 거의 대부분의 분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다.
토기를 깨뜨려서 묻는 행위는 현실세계와 사후세계를 분리할 수 밖에 없는 경계선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추정한다.
순장 역시 장송의례의 하나이지만, 고대인의 계세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고, 생전의 권력관계가 죽음 이후까지 반영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부여에서는 피순장자들이 백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하고, 신라에서도 왕이 죽었을때 남녀 5인을 순장했으며, 지증와대에 이 같은 풍속을 금지했다는 기사가 전해진다. 가야에는 기록은 없지만, 발굴을 통해 가장 많은 순장사례들이 확인되고 있다. 순장이라고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주인공과 주변인과의 계층적 차이가 뚜렷하게 주종관계로 나타나는 계층성과, 같은시기에 한꺼번에 매장된 경우인 동시성과,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적 힘에 의해 죽은자들이 함께 매장된 강제성을 띄고 있어야 한다.
가야인들은 변해가는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합리적 사고의 전환보다는, 자신들의 믿음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가야사회가 극복해 내지 못했던 모순 구조의 한 양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결론
가야는 백제, 신라와 함께 동시대에 건국되어 6세기까지 독자적인 문화적 저력과 주체적인 역사적 발전 속에서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강력한 국가로 존속하였다. 그럼에도 삼국의 부수적 위치에서 존립하다가 신라에 병합되어버린 소집단으로 인식되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근래에 이르러 김해 대성동 고분군 등 가야 지역의 유적이 발굴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가야사가 연구되고 있는 것 같다.
김해시에서도 가야사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수로왕릉을 중심으로 대성동과 봉황동 일대에 ‘수릉원’이란 이름으로 테마 거리를 조성하고 있다.
주거환경인 고상가옥과 망루가 만들어지고, 저잣거리와 가야인 주막 등 전통문화촌이 만들어지고 있다. 또 ‘가락국기’를 시작으로 ‘쇠의 바다 김해’ ‘제 4의 제국’ ‘현의 노래’ 등 테마 공연이 계획되고 만들어지고 있다.
과제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알게되었고, 아직까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 자신에게는 많은 공부가 되었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탄생 설화가 깃든 구지봉 기슭에 자리한 김해박물관은, 검은색 벽돌로 되어있어 왜 그렇게 어두운 색을 사용했을까 궁금했었는데, 그것은 철광석과 숯을 이미지화하여 ‘철의 왕국’ 가야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제 3전시실인 <금관가야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성동에는 금관가야를 옮겨 놓은 듯한 ‘대성동박물관’이 있다.
이제는 시간에 쫓기지 말고, 높이 19Cm, 구경 12-13.5Cm 크기의 오르도스형 항아리로, 생김새나 제작 기법이 부여의 것과 비슷하여 기마민족 남하설로 주목받고 있는 ‘동복’도 다시보고, 왜로부터 교역품으로 왔다는 ‘파형동기’ ‘통형동기’도 다시 한번 보러 가야겠다.
어쩐지 가야사에 대해 아직은 무심해 보이는 김해 시민들이, 10월에 개최될 ‘가야문화세계축전 2005’를 시작으로 하나된 마음이기를 기대해 본다. 나부터 주인된 마음으로 가야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 공부를 해 보고 싶다.
<참고문헌>
<가야인의 삶과 문화> 권주현 2006
<가야, 잊혀진 이름 빛나는 유산>
<가야는 신비의 왕국이었나> 청아출판사 2007
<미완의 문명- 7백년 가야사> 김태식 2005
<가야는 신비의 왕국이었나>
  • 가격1,8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7.07.17
  • 저작시기2007.7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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