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석굴암 구조, 석굴암 창건, 석굴암 역사, 석굴암 건축구조, 석굴암 비례관계, 석굴암 전체구조, 팔부신중, 인왕상, 사천왕상, 범천, 제석천, 문수보살상, 현수보살상, 십대제자상, 십일면 관음보살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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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석굴암]석굴암 구조, 석굴암 창건, 석굴암 역사, 석굴암 건축구조, 석굴암 비례관계, 석굴암 전체구조, 팔부신중, 인왕상, 사천왕상, 범천, 제석천, 문수보살상, 현수보살상, 십대제자상, 십일면 관음보살상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석굴암의 구조

Ⅲ. 석굴암의 창건

Ⅳ. 석굴암의 역사

Ⅴ. 석굴암의 건축구조와 비례관계

Ⅵ. 석굴암의 전체구조

Ⅶ. 팔부신중

Ⅷ. 인왕상

Ⅸ. 사천왕상

Ⅹ.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
Ⅺ. 문수보살상
Ⅻ. 현수보살상(普賢菩薩像)

ⅩⅢ. 십대제자상

ⅩⅣ. 십일면 관음보살상

ⅩⅤ. 본존불

ⅩⅥ. 감실

ⅩⅦ. 천장 연화문

ⅩⅧ. 석기둥

ⅩⅨ. 원형 삼층석탑

본문내용

다.
본존불 뒤 벽에 깊숙이 새겨놓은 소박하고도 빼어난 연화문 광배는 본존불의 영광을 드러낸다. 광배를 불상에 직접 붙이는 일반적 방법과는 달리 간격을 두고 몰리 배치하여 더 입체적인 조화를 느끼게 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광배의 둘레을 돌아가며 장식한 연꽃잎을 위로 돌라갈수록 크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작개 한 것이다. 이는 아래에서 본 사람의 입장에서 위에 위치한 것일수록 작아보이기 떠문에 실제 조각은 위쪽을 더 크게 만든 것이다. 불두의 크기가 몸의 크기에 비하여 크게 만들어진 것도 이와 같은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또한 본존불은 주실의 한가운데에 자리하지 않고 뒤로 약간 물러난 위치에 있다. 이는 앞을 향해 전진하는 듯한 동적인 이미지의 본존블을 만든다. 만약 본존불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면 주실이 비좁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신비로움이 가득 간직한 본존불이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그런데 1913년 중수 때 비도와 본존불 사이에 있는 좌우 동기둥을 연결하는 야치형의 양석을 가로질러 놓아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는 본존불의 시야를 가리고 말았다. 또 본존불의 대좌 밑에는 지하구가 솟아나는 샘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 보수하면서 막아버렸다. 이 샘은 원래 감실의 환기구멍과 함꼐 석굴암 안의 습도를 조절하는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 본존불이 석가모니불이냐 아미타불이냐 하는 판단을 두고 서로 다른 견해가 있으나 우선 석가모니불의 특징인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는 점, 둘쩌, 본존불 주위에 십대 제자가 있고 문수와 보현 보살이 협시하고 있다는 점, 셋째,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의 현장스님이 부다가야에서 본 석가모니성도상이 당나라 척도로 폭 11.8척, 높이 13.2척이라고 『대당서역기』에 적고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석가모니성도상의 크기인 폭 11.8척, 높이 13.2척으로 만들었다는 점 등으로 석가모니불로 판단하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수광전’이라는 현판 등이 있었던 것은 당시 유행하던 아미타 신앙의 요소를 받아들인 때문이라는 것이다.
ⅩⅥ. 감실
석굴 위쪽 본존불의 얼굴 높이에 열 개의 감실이 있다. 감실에는 환조로 된 보살상 7구와 유마거사상으로 보이는 나한상 1구가 앉아 있다. 비어 있는 감실은 일제 시대 때 도둑 맞은 까닭이다. 감실 안의 보살들은 본존여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설법을 하고 있는 보습이다. 자세와 표정이 각양각색이면서도 각기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잃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보살들 틈에 유마거사가 끼여 있다는 점인데, 머리 깎고 중이 되지 않더러도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준다. 감실에 앉아있는 보살상의 자세는 모두 다른데, 감실 안에 위치하고 있어서 밑에서 쳐다보는 사람 눈에 잘 뜨이지 않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철저하게 조각해 완성해 놓은 것이 성의 있어 보인다.
원래 감실 뒤에는 환기와 통풍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 시대 때 해체 복원할 때 시멘트로 막아버려 공기순환이 자유롭지 못해 이슬이 맺히는 결로현상이 더 심하게 됐다.
ⅩⅦ. 천장 연화문
석실 금단의 조성은 먼저 본존불을 제자리에 안치하고 주변의 벽체와 궁륭을 만들었다. 본존불의 크기로 사천왕상 앞의 팔각형 기둥 사이를 통과하기도 어렵고 설사 기묘하게 반입하였다 해도 대좌 위에 본존불을 올려 놓으려면 두 가닥의 장대에 도르래를 걸고 잡아 당겨야 하는데 천장이 있다면 높이가 제한되어 본존불을 대좌위로 올리는 작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고급 기술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재주를 부려야 했다. 만에 하나 돌이 하나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본존불과 아래의 조각상들이 치명상을 입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장구축 작업을 내부에서 하지 않고 외부에서 해야 했으며, 결론적으로 천장은 하늘처럼 둥글게 짜인 궁륭 모양으로 30개의 돌못이 쐐기처럼 박혀 궁륭 천장을 받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돌못은 둥근 아치형의 천장이 지루하지 않게 변화를 주는 장식 역할까지 하고 있으며, 햇살처럼 여래의 빛이 하늘가에서부터 퍼져나오는 느낌을 주어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석실 금당의 천장이 높이 평가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천장 맨 꼭대기에는 하나의 큰 돌을 중심으로 하여 웅장하고 화려한 단선 복한의 연화를 세기고 있는데, 이 큰 돌은 김대성의 창건설화에 나오는 바와 같이, 천신이 세 조각을 이어 붙인 듯 균열이 있다.
천장은 앉아 있는 본존불이 일어서서 움직이더라도 머리끝이 천장에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로 치밀하게 만들어졌다.
ⅩⅧ. 석기둥
비도(하늘로 들어가는 길)에서 둥근 주실로 들어가는 입구 양쪽에 대문처럼 팔각기둥이 서 있다. 둥근 목련꽃으로 된 주춧돌 위에 팔각기둥을 세우고 기둥 높이 3분의 2되는 곳에 둥근 연꽃을 장식하였다. 일제는 본존물의 눈높이에서 두 기둥을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양석을 놓았는데, 이는 일본 신사의 양식일 뿐더러 동해를 바라보는 본존불의 시야를 가려놓고 말았다.
실상 이 팔각기둥이 석굴암을 떠받치고 있는 것을 아니나, 시각적으로는 석굴암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이 기둥으로 하늘세계와 땅세계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ⅩⅨ. 원형 삼층석탑
석굴암을 나와 요사채 앞을 가로질러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독특한 삼층석탑을 볼 수 있다. 원형의 지대석과 팔각 원당형으로 된 2중 기단에 장형의 3층 탑신부가 놓여진 독특한 양식의 삼층석탑이다. 이런 석탑 형식은 매우 독특한 예인데 어디에서 유래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높이는 3,03m이며, 8세기 말의 것으로 추정된다.
각 몸돌에는 우주를 모각하였는데, 특히 1층 몸돌은 2층 몸돌에 견주어 훨씬 크고 높직하다. 각층의 지붕돌 층급받침은 3단이며 지붕돌은 평평하고 얇은 형태이다. 크고 높직한 1층 몸돌은 둥근 대좌와 잘 대비되고 있다.
직선적인 처마, 얇고 산뜻한 낙수면은 단아하게 느껴지며, 전체적으로 원과 사갈, 팔각이 조화를 이루고, 기단부와 탑신부 상하가 균형을 이룬다. 보물 제911호호 지정돼 있다.
그 밖에도 석굴암 아래쪽에는 해체 수리 당시 복원되지 못한 석재들이 방치돼 있다.

키워드

석굴암,   경주,   신라,   문화재,   본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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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8.03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23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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