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귀속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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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사귀속문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고구려 종족 기원 - 중국의 고대 소수민족인가? 한민족을 형성한 종족인가?
2. 고구려의 성립지역과 한군현의 역사해석 문제
3. 고고학적인 접근 - 고구려 문화의 독자성
① 적석총
② 온돌문화
③ 성곽의 비교
4. 고구려는 독립국가인가 중원왕조의 지방정권인가?
① 당대의 금석문에 나타난 고구려인의 천하관
② 수당전쟁을 바라보는 시각
③ 화이론에 근거한 조공 ․ 책봉관계의 해석
5. 고구려 멸망 후의 문제들
① 대중항쟁을 통해 본 고구려의 정체성
② 고구려 유민의 거취
6.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들 - 발해와 고려
① 발해와의 계승성
② 고려와의 계승성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논거에서 출발하여 정치적 관계에서도 발해는 당의 지방정권에 불과하며 당 문화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고구려인의 비중과 고구려문화의 영향이나 계승관계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거나 무시하는 연구방향은 발해사에 대한 배타적 점유를 의도한 것이다. 임기환, <韓·中 역사분쟁과 고구려사·발해사 인식>,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4)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인을 주축으로 성립된 나라였던만큼, 고구려 계승 의식이 분명하였다. 이 점은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에서도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발해가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발해왕이 자신을 고구려왕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일본서기』를 보면 발해의 3대 문왕이 일본에 국서를 보낼 때 자신을 "고려국왕 대흠무"로 표기했다는 사실이 나타난다. 이것은 발해의 지배층이 고구려 계승 의식을 뚜렷이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또한 발해의 고분 양식이나 온돌 구조 등에서도 고구려 계통임이 증명되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민족 융합 정책에 따라 발해 유민을 고구려의 후예들이라 하여 받아들였다.
“고려가『발해사』를 짓지 않았으니 고려의 국력이 떨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하자 김씨가 그 남쪽을 영유하였고 대씨가 그 북쪽을 영유하여 발해라 하였다. 이것이 남북국으로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했음에도 고려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유득공(1748~1807)의 발해고(渤海考) 서문>
유득공의 이러한 언급은 발해를 우리 국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발해 고토가 우리 영토라는 사료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한국 사학사에서 이른바 통일 신라론을 거부하고 신라와 발해가 각각 대동강 일대를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다시 규정하는 사론을 이끌어냈다. 따라서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우리 역사의 큰 줄기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계승성을 재확인할 수 있게 한다.
② 고려와의 계승성
중국은 고구려와 고려의 건국 시기의 현저한 차이와 통치관할구역이 서로 다름을 근거로 두 나라가 무관하다고 주장한다. 고려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백성이 흩어진지 250년 후에 건립되었고, 통치관할구역도 고구려의 원 구역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즉 고구려의 지역 대부분이 오늘날 중국 변경 지역 내에 있었고 고려의 통치 지역은 오늘날의 평양시 남쪽의 한반도 지역이라는 것이다. 이는 고구려가 명백한 한국사인 고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중국은 심지어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게 아니다’ 며『송사(宋史)』<고려전>의 “고려는 본래 고구려라 한다” 는 자국 역사서의 내용까지 부정하는 억지를 부리기도 하였다. 이는 고려가 고구려를 승계한 국가라고 생각한 당시 사람들의 역사의식이었다.
고려는 나라 이름을 고구려(5세기 이후 고구려를 줄여 고려로 칭함)에서 따올 정도로 정신적으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다. 또한 북진정책을 추진해 개경과 함께 서경(평양)을 양대 수도로 삼을 정도로 실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였다.
고려 인종 때 사신으로 왔던 서긍이 귀국 후에 작성한 보고서『고려도경(高麗圖經)』에 “왕씨의 선조가 고려(고구려)의 대족이었다” 는 기록이 있고,『고려사』의 ‘고려세계’에도 왕건의 조상이 백두산을 유력했다고 기록해 왕건의 조상이 고구려나 발해에서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 성종 12년 요(遼)의 대군이 침입하자 서희는 요장 소손녕과 회담하면서 “고려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나라 이름도 고려라고 하며 평양을 도읍지로 삼았으며, 고구려 땅의 경계로 따진다면 요의 동경(東京)도 그 경계 안에 있다”고 반박했다. 김부식의『삼국사기』, 이규보의『동명왕편』, 이승휴의『제왕운기』에서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명백히 했다. 이러한 인식은 고려가 동명왕에 대한 제사를 받든 데서도 볼 수 있다. 고려가 발해 유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발해가 고려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Ⅲ. 결론
지금까지 고구려사의 귀속문제를 결정짓는 중요 논점들에 대하여 우리 학계와 중국 학계 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중국 동북지역의 소수 민족 지방정권이었음을 다양한 측면에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에 대한 왜곡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우는 각 종 사료조차도 면밀히 검토해보면 오히려 고구려사가 우리 역사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할 뿐이다.
그러나 국가주도 하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된 중국의 방대한 고구려사 연구는 그 진실성 여부를 떠나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최근 중국학계는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의 중심인 한반도 서북부 지역도 본래는 중국의 군현이라는 새로운 논지를 펼치고 있다. 즉 현 중국의 영역을 기준으로 중국사의 범위를 설정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과는 별개로 또 다른 역사 범주와 귀속의 기준이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사가 역사 귀속 논쟁의 대상이 됨은, 이제는 단지 만주 지역의 역사만이 아닌 한반도 북부 지역의 역사적 영역 문제로 확대되게 된 것을 뜻한다.
중국학계에서는 한군현과 한반도 북부영역에 대한 역사적 점유를 매개로 고조선사도 중국사에 편입하는 후속작업이 이어지고 있으며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로 이어지는 계통관계를 완전하게 설정해 둔 실정이다.
그에 비해 우리의 대응책은 단순히 중국 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듯 하다. 정부차원의 지원과 활발한 연구 그리고 고구려사 귀속문제에 대한 깊은 관심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거의 역사는 더 이상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오늘날 우리의 현실문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사가 우리나라의 역사를 형성하는 한 줄기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 참고문헌
노태돈,『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윤명철,『고구려는 우리의 미래다』, 고래실 (2004)
신형식 편저,『고구려는 중국사인가』, 백산자료원 (2004)
임기환, <韓·中 역사분쟁과 고구려사 · 발해사 인식>,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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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8.10
  • 저작시기2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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