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동북공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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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동북공정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기일. 서 론
-동북공정, 무엇이 문제이며 왜 다루고자 하는가?-

기이. 본 론
<1> 정의; 동북공정이란 무엇인가?
<2> 배경 및 원인; 동북공정의 배경과 원인은 무엇인가?
<3> 논리와 반론;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다?
<4>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보아야 하는 당위성
<5> 현황; 동북공정에 대한 대처현황
1. 학계의 대처
2. 시민단체의 대처
3. 정부의 대처
<6> 대응; 동북공정에 대한 앞으로의 대응방안

기삼. 결 론
-동북공정에 관한 종합적 이해와 대처-

기사. 참고논저

기오. 부 록
-동북공정에 대한 취지문과 연구 과제, 일부기사와 논문-

본문내용

입했고,《구오대사고려전》의 고씨 고려에 관한 기술을 정밀하게 해서 왕씨 고려 건국의 기원을 잘 추적해 서술하였고, 《구오대사고려전》속의 ‘당의 말년에 이르러 중원에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 나라는 마침내 스스로 군장을 세웠다.’ 고 하는 이 한마디를 간단히 요약해서 ‘後稍自國(후에 간신히 나라를 세웠다)’이라 했고, 그 후에 편찬한 《신당서고려전》속에 넣었다. 그런데 《구당서고려전》 속에는 바로 이러한 기록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고씨 군장이 마침내 끊어졌다.’라고 하여 고씨 고려 왕족이 이미 대가 끊긴 것으로 밝히고 있다.
《송사》는 원나라 시대에 원나라 사람인 탈탈(脫脫) 등이 쓴 것으로 이 책 속에는 고려전을 별도로 한 권으로 만들어 이렇게 이르고 있다. : “고려는 원래 고구려이다. 우 임금이 구주를 구분해서 기주 땅에 속하게 했고, 주나라 때에는 기자의 나라로써 한나라의 현도군이다. 요동에는 대체로 부여의 별종이 평양성을 나라의 도읍으로 삼았다. 한위 이래로 늘 朝貢을 하였지만 그래도 몇 차례 중국의 변방을 침략했다. 수양제가 다시 군사를 일으켰고 당 태종이 친히 나가 정벌을 했으나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당 고종은 이적(李勣)(?)을 보내어서 그 성을 함락시켜 땅을 나누어 당의 군현으로 삼았다. 당 말기에 중원이 소란스러워지자 고려는 마침내 스스로 군장을 세웠다. 후당(後唐)의 동광(同光), 천성(天成) 연간에 고려의 임금 고씨가 여러 번 朝貢을 해왔다. 장흥(長興) 연간에 권지국사(權知國事) 왕건(王建)이 고씨의 지위를 계승하여 사신을 보내어 朝貢을 하였다……”. 이후 기술한 것이 왕씨 고려와 송 왕조의 왕래 교류에 관한 사실이다. 내용으로 보건대 《송사고려전》은 앞 부분에서 신구오대사의 기록을 종합하고, 거기에다 두 책의 저자가 명확히 표시하지 않은 왕씨 고려와 고씨 고려의 관계를 직접 “왕건이 고씨의 지위를 계승했다.”라고 하여 양자로 하여금 전후가 서로 이어지는 계승관계로 바꾸어 버렸다. 《요사》,《금사》도 원나라 사람 탈탈 등이 적은 것으로 그 속에 비슷한 오류가 존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 이후의 사서가 기본적으로 이와 같은 잘못된 서술을 따랐으니, 《명사》는 그 전의 사서보다 더 나아가 이성계를 조선 국왕으로 冊封하는 이유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하기 위해 위의 잘못을 이어 받았을 뿐 아니라 이씨조선 정권의 연혁을 정리(完整)했지만, 그러나 잘못된 설명을 하였다. 즉 기자조선-위씨조선-한사군-고구려-東徙復國(동쪽으로 옮겨가 나라를 세움)-왕씨고려-이성계 국호 개칭전의 고려-이씨조선 등의 순으로써, 중국 역사에 속한 기자조선, 위씨조선, 한사군, 고구려를 모두 조선사 속에 넣었다.
중국사서에 위와 같은 착오가 나타난 이유는 여러 방면에서 온 것 같다. 그 중 전란으로 인해 문헌이 흩어지고 왕씨 고려의 의도적인 오도가 그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續資治通鑑長編》 323권 원풍(元豊) 5년(1082) 2월 기사조(己巳條)에 의하면 “사관(史館)의 수찬관(修撰官) 증공(曾鞏)이 말하기를: ‘옛 사서를 가만히 고증해 보니 고구려는 주몽 때 흘승골성(紇升骨城)을 확보하여 거주할 때부터, 이름을 고구려로, 그리고 高를 성씨로 하였고, 한당을 거쳐 고종 때 그 왕 고장(高藏)이 나라를 잃어 안으로 옮겨갔다. 성력(聖歷) 연간에 장(藏)의 아들 덕무(德武)가 안동도독(安東都督)이 되어 그 후 점차 나라가 되었다. 원화(元和) 말년에 악공(樂工)을 헌납한 적도 있었다. 그 이후 다시는 중국에 보이지 않았다. 오대(五代)의 동광(同光), 천성(天成) 당시 고려왕 고씨가 다시 朝貢하러 왔지만 그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장흥 3년 권지국사 왕건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으므로 왕건을 왕으로 삼았다. 건의 아들 무(武), 무의 아들 소(昭), 소의 아들 유(人+由), 유의 동생 치(治), 치의 동생 송(誦), 송의 동생 순(詢)이 서로 이어 왕위를 계승했다. 대저 주몽에서 장(藏)까지 한 성씨가 900년, 21대를 거쳐 나라를 잃었다. 그 이후 다시 스스로 나라를 세웠지만, 그 이름과 세차, 흥망의 본말과 왕건의 세계(世系)는 모두 고증할 수 없다.’ ” 이후 왕씨 고려가 송에게 왕씨 고려와 고구려가 연결된 “고려세차(高麗世次)”를 올렸다. 이를 통해 송나라 사람은 고구려와 고려에 대한 인식이 매우 모호했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다 왕씨 고려가 올린 고려세차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도하는 작용을 하였다. 그 때문에 중국사서에 많은 착오가 등장한다. 그 결과 “고려”라는 중국 고대 변방민족의 칭호가 삼한의 신라를 계승한 왕씨 정권이 남의 이름을 모칭하고, 또 왕씨 정권의 계승자인 이조 또한 기자조선이 쓴 “조선”을 자기의 머리 위에 씌워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 고대 동북 지역의 변방정권의 연혁과 상황에 대한 인식에 많은 혼란과 잘못된 이해를 초래하였다.
자료는 연구를 끊임없이 진행하고 심화할 수 있는 토대이다. 한문 사적 중 고구려 관련 기록에 대한 연구는 양보륭(楊保隆)의 《각 사서에 나타난 〈高句麗傳〉의 몇 가지 문제에 대한 辨析(各史〈高句麗傳〉的幾個問題辨析)》(《民族硏究》1987년, 제1기 수록)이 이 방면에 유용한 글이지만, 앞으로도 연구해야 하고 또한 연구할 만한 부분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맺음말
고구려의 역사 연구를 정상적인 학술연구와 연결시키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우리는 고구려의 역사 연구에서 역사 문제를 현실문제화 한다거나, 학술을 정치문제화 하는 경향과 그런 행동에 반대한다. 고구려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와 조선반도의 역사에서 깊이 연구를 요하는 과제이다. 열심히 연구해서 과학적인 연구결과를 학계에 제공하고, 더 나아가 고구려 역사 연구를 깊이 있게 추구하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다. 연구의 결론에 차이가 있으면 그것은 순전히 학술적 규범을 통해 교류하며 논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당장 같은 견해를 가질 수 없다 하더라도 상호 존중하면서 공통점을 찾아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고구려 역사에 관한 연구는 각국 학자의 공동 노력 하에 반드시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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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05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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