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홍구의 대한민국사 2권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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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2권 요약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부∥ 평화를 사랑한 백의민족? ―그 감춰진 역사
- 호떡집에 불난 사연 (반중국인 폭동과 화교들의 수난)
- 학살은 학살을 낳고… (결코 참전하지 말았어야 할 베트남 전쟁)
- 누가 우리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는가 (베트남 파병의 대가)
-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님께 (마음까지 새까맣게 타버린 당신)

∥2부∥ 박정희, 양지를 향한 끝없는 변신
- 기회주의 청년 박정희! (남자의 변신은 무죄?)
- 동네보스, 왕보스에 투덜대다 (박정희와 한-미관계)
- 독재정권이 더 악랄했다 (서대문형무소, 일제의 만행만 기억할 것인가)
- 빨갱이에게도 인권이 있다 (강제전향의 진흙탕에서 피어난 연꽃 ‘비전향 장기수’)

∥3부∥ 김일성이 가짜라고?
- 미완의 `아리랑`을 위하여 (잊혀진 혁명가 김산의 발자취를 찾아서 1)
- `아리랑`의 최후를 아는가 (김산의 발자취를 찾아서 2)
- `김일성 가짜설` 누가 퍼뜨렸나 (이남사회를 지배해온 터무니없는 이야기들)

본문내용

의 아우성을 무시하고 언론개혁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6부∥ 역사를 통한 세상읽기
노병은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나이에 관한 역사적 명상)
40대의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이 40대 기수론을 부르짖으며 대통령 후보 지명전 출마를 선언하자 당 원로와 중진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러나 결국 1970년 9월 29일 열린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지명 전당대회는 40대 후보 3인의 각축으로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30년, 세대교체를 부르짖으며 등장했던 40대 기수들은 그들이 교체하려 했던 노장층의 나이를 10여 살 이상 넘기고도 80살을 바라보며 아직도 현역으로 뛰고 있다.
이른바 3김 시대의 또 한 명의 주역인 김종필. 인생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지만 정군과 하극상으로 일어선 청년 김종필은 채 40살이 되기 전에 신악의 주역이 되고, 50대 초반의 나이에는 그가 만든 공화당 내에서 정풍운동의 표적이 되었다. 그랬던 김종필이 이제 80살을 바라보는 나이까지 살아남아 “노목(老木)을 건드리면 신의 노여움을 탄다”고 몽니를 부리고 있다. 기억하는가? 그가 몰아내고자 한 기성세대, 예컨대 송요찬, 최영희, 백선엽 등의 나이는 40대 초반에 불과했다.
나이만으로 세대교체를 강제할 수는 없다. 이 땅의 젊은 세대 역시 권위주의와 위계문화에 길들여져 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임에도 선후배를 따지고 기수를 따지는 행태는 패거리문화, 지역주의, 학벌주의와 함께 날로 심해지고 있다. 기 한번 펴보지 못하고 실직의 공포에 시달리는 이 땅의 40대들,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대로 나이든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대로 다들 자기 나이를 잊고, 나이에 걸맞은 역할을 못하며 살고 있는 듯하다.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은 노병들의 전성시대가 낳은 비극이 아닐까?
‘자객열전’에서 배운다 (조양자의 눈물을 미국에 기대할 수 있을까)
고전으로 꼽히는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 속의 수많은 인간들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에서 사마천이 가장 짠한 마음을 갖고 썼음직한 부분이 바로 오늘날의 암살자나 테러리스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의리와 죽음의 이야기인 『자객열전』이다.
사마천이 자객들에 대해 매우 동정적으로 서술한 것은 암살이라는 그들의 행위를 약자들의 무기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결과나 수단보다는 목적과 동기를 중시했던 고대인의 사유방식 속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며 뜻을 이루려 했던 자객들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즉 무고한 희생자를 내지 않고 나름대로 테러를 당할 만한 이유가 있는 개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기에, 사마천도 약자들의 무기로서의 테러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테러는 꼭 적의 수뇌부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경향이 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직후 수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저마다 자기네가 주도한 의거라고 나섰던 것과는 달리 9.11 항공기 테러의 경우 아무도 “우리가 했소”라고 나서지 않는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라는 증오와 원한의 피눈물이 짙게 배어나는 이 테러가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가 의열투쟁이라 불렀던 테러는 언제 어떤 경우에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신문고는 원래 ‘폼’이었다 (군대 시절 소원수리 떠올리게 하는 청와대 앞 대고각)
신문고. 우리는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조선왕조시대의 민의 상달을 위한 장치라고 배운 이 제도에 묘한 향수가 있다. 인터넷 인구가 2천만 명에 육박하는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사이버 공간에는 신문고란 이름의 각종 고발 사이트가 연이어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신문고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인 태종 원년(1401)에 설치되었다. 신문고는 국왕에 직속되는 근위대인 동시에 일정한 범위에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기수인 순군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순군이 의금부로 개편되면서 신문고는 의금부 당직청에 설치되었다. 그런데 순군이나 의금부 당직청이 궐내에 있다 보니 일반인들이 신문고를 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또 신문고를 치는 데에는 엄격한 절차까지 있었다. 따라서 신문고는 취지와는 달리 서울 거주 문무 관료 등 상층부에 속한 자들만 이용하였고, 일반 백성이나 노비 등의 처지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큰 쓸모가 없었다. 한우근 교수는 신문고가 민의창달이라는 관념적인 아름다운 뜻에 부합했다기보다는 태종 초에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특수신분층에 은총을 베푸는 한편, 관료의 발호를 억제하는 효용만 있었다고 평가했다.
청와대 앞에 대고각이 설치된 것은 오랜 군사독재를 벗어나면서 대중의 억눌린 언로를 튼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폼나는’ 조치였다. 그러나 ‘폼나는’ 조치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울, 40년 전부터 만원이었다 (서울 변천사에 대한 서울 토박이의 넋두리)
해방 당시 서울의 인구는 90만 명, 이 인구가 10배 이상 늘어나는 데는 4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1800년에 인구 100만 명이 된 런던이 인구 800만 명을 넘어서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140년. 서울은 그 4분의 1정도의 기간에 엄청난 공룡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서울의 폭발적 팽창으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인구팽창을 감당할 만한 상 하수도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는데, 사회복지망이야 어디 감히 꿈이나 꿀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먼저 서울에 올라온 사람들과 서로 의지하며 정보도 주고받고 살아가다 보니 자연히 학연과 지연을 따지는 연고주의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군사독재 치하에서 오랜 기간 지방자치를 실시하지 않는 사이에 서울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커버렸고 모든 권력은 서울에 집중되었다. 옛날에도 시골 사람들은 “서울놈들은 비만 오면 풍년이란다”라며 서울 사람들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것을 탓했다. 그리고 “쌀나무도 알고 있는 슬기로운 머리”를 가진 서울 사람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서울은 만원이다. 이미 40여 년 전부터 서울은 공동묘지까지 만원이다. 어쩌다 지방에 갔다가 서울에 돌아올 때면 톨게이트 너머로 뿌연 빛을 발하는 보랏빛 하늘을 보며 집에 다 왔다고 안도하는 서울 토박이의 넋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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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8.23
  • 저작시기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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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26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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