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있어서 근대적 개혁의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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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에 있어서 근대적 개혁의 추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본론
1. 개화사상의 발생과 개화파의 형성
2. 갑신년의 정변
1) 개화파 형성 후의 활동
(1) 신식군대의 양성
(2) 인재의 양성
(3) 사회 ‧ 문화 개혁운동
(4) 기타개혁
2) 갑신정변의 구체적 계획과 실행
3. 갑오년의 개혁
1) 전제
(1)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 청국
(2) 경제적 상황
(3) 농민봉기
2) 갑오개혁의 문제점
(1) 정권의 장악과정
(2) 반봉건에 관하여
(3) 반침략에 관하여

결론

본문내용

유, 과거제도의 폐지, 전국재정의 일원화, 세금의 금납, 도량형의 통일, 은본위제의 신식화폐장정등이다. 그러나 봉건적 토지제도를 뜯어고칠 방안을 마련하지 않아 개혁의 기본 방향은 농민보다는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군국기무처가 주관한 1차 개혁은 곧이어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내정을 간섭하면서 변질되어 갔다. 일본은 1894년 12월 이용 가치가 없어진 대원군 계열을 제거하는 대신 갑신정변 때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를 불러들이고, 각 부서에 일본인을 고문관으로 앉혔다. 또 일본 공사 이농에는 고종에게 홍범 14조를 발표하게 하여 청의 간섭과 왕실의 정치개입을 철저히 배제했다. 이때부터 1895년까지 실시한 2차 개혁을 흔히 을미개혁이라고 한다.
(3) 반침략에 관하여
반침략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개화파 정권과 일본과의 관계를 보는 것이 중요한다. 첫째, 일본은 한일점정합동조관을 맺었다. 쿠데타 후 왕궁을 점령한 일본국은 국왕을 감금상태로 만들었다. 국왕과 대원군은 재삼 일본군이 조약 조인의 교환조건으로 왕궁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하여 굴국 목적을 달성했다. 조약의 주요한 점은 일본의 권고에 따라 내정개혁을 행할 것, 경부 경인의 철도, 전선 등의 권리를 일본에 넘길 것과 왕궁침략사건에 관하여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게다가 조일양국맹약이라는 동맹조약을 조인하고 있지만, 내용은 청병의 철수와 일본국의 식량운반을 조선이 담당할 것 등이었다. 이로써 일본국의 조선침략을 추궁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침략전쟁에 협력하게 되었다. 이것은 개화파정권이 민족적 주체성을 방기하여 일본에 종속하고 있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 조약 후 무장해제시킨 조선군대를 재편성하여 일본장교의 감독 g에 두고 일본군의 후방치안과 수송을 담당하게 하였다. 개화파가 이와 같이 일본에 종속하여 반민족적 정책을 취하고 있었지만 95년 10월 민비살해 후 그 처리책에서도 동일한 것이 지적될 수 있다.
이에 침략자 일본군에 반대하여 민중은 각지에서 군용전선을 절단하기도 하면서 투쟁하였다. 지방에 분산해 있던 농민군은 10월 재차 일본군의 격퇴를 위해 전국적으로 일어났지만, 개화파 정권은 침략자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과 일대결전을 벌여 진압하였다. 조일동맹조약은 청국과의 전쟁보다는 농민군에 대한 반혁명전쟁에서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90년대의 개화파정부의 반민족성은 결정적이라고 생각된다.
이상 개화파에 초점을 두어 갑오개혁을 살펴보았지만, 개혁 그것은 획기적인 것으로 그 후 계승 발전된 것도 많았다. 그러나 일본의 패퇴는 일본에 의거하고 잇던 개화파의 망명으로 끝나고 개혁의 대부분은 좌절했다. 그 이유는 조선민중에게 에너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개화파의 태도 즉, 침략군과의 관계 아래로부터의 민중의 개혁요구에 등을 돌리고 침략자와 연합하여 그것을 탄압하고 아래로부터의 에너지를 압살한 것에 의한다.
다시 말해, 갑오개혁은 조선이 봉건사회를 벗어나 근대 사회로 나아가려면 갖추어야 할 겉모습은 담고 있었다. 그러나 개화파는 개혁을 뒷받침할 민중의 역할이나 일본의 침략의도를 올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다. 갑오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개화파들은 농민군이 주장한 개혁안을 일부 받아들이면서도 농민전쟁을 근대문명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일본군과 협력하여 농민군을 철저히 진압했다. 갑오개혁은 근대 사회로 나아가려 한 부르주아적 개혁이었다. 그라나 자주성을 잃고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끝내 유생들을 비롯한 지방 세력의 저항에 부딪혀 꺾이고 말았다.
결론
이 글에서는 박종근씨의 논문을 기초로 하여 여러 도서를 참고하여 크게 개화사상의 발전과 개화파의 형성, 갑신정변 그리고 갑오개혁을 살펴보았다.
개화사상과 개화파의 발생은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청 등에서 문물을 받아들인 서울 양반 자제를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 이들은 세계무대에서 뒤쳐진 조선을 개화를 통해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개화에 많은 공을 세우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민중들에게 개화에 대하여 끌어들이지 못함으로 결국 처음 그 뜻을 끝까지 이어가지 못하였다. 또한 메이지유신을 그 모델로 하여 친일본적인 성격을 띄게 되어 후에 일본의 침략적 성격을 바르게 보지 못한 것도 맹점으로 지적된다.
이런 개화파들이 민씨 정권에서 친정수구의 정책을 취하고, 이전의 개화정책을 크게 되돌리는 정책을 사용함에 청불전쟁으로 인해 청군이 조선에서 반수가 빠진 틈을 이용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쿠데타를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은 쿠데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많은 제약점을 안고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성격은 일본학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방법의 적절치 못함은 있었지만 상당히 자주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들의 세력이 강성하지 않으므로 일본의 세력을 빌려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것이지 일본의 사주를 받아 조선에 정부를 세우는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또한 신정강을 통하여 갑신정변의 성격을 보아도 조선 사회를 낡은 봉건 제체에서 근대 자본주의체제로 발전시키려 한 최초의 시도였다. 하지만 이 정변의 실패로 인해 후에 개혁의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고 보이며, 민중들에게도 이러한 사건은 개화, 개화파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삼정의 문란과 농민에 대한 봉건 수탈이 부른 농민전쟁으로 인하여 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고 일본의 내정간섭에 이은 침략으로 인하여 세워진 정부에서 갑오개혁은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부터 자주성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상처를 안고 시작된 개혁이었다. 또한 조선에는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여러 사회집단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하나로 모으기는커녕 농민의 힘을 스스로가 무너뜨림으로써 조선을 분열시키고 결국엔 식민지로 전락하게 한 주체가 바로 개화파인 것이다. 갑오년의 개혁의 내용에 있어서도 근대적 사회로 나아가려는 모습이 보이지만 조선의 내재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생각은 않은 채 일본의 꼭두각시와 같이 조선침략을 도운 것은 어떻게 보아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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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17
  • 저작시기2007.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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