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벽화 완전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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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고구려의 역사와 사회

(1) 고구려의 건국
(2) 고구려의 발전
(3) 정치와 사회
(4) 음악과 무용
(5) 고구려의 시대적 개관

3. 고구려 고분벽화

(1) 초기 (약 350 ~ 약 450년)
① 동수묘(冬壽墓)-안악 3호분
② 덕흥리 고분벽화

(2) 중기 (약 450 ~약 550년)
① 쌍영총(雙楹塚)
② 무용총(舞踊塚)

(3) 後 期(약 550년 ~ 668)
① 집안(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

(4) 그 외
① 모두루총(牟頭婁塚)
② 각저총(角抵塚)
③ 통구12호분(通溝十二號墳)
④ 삼실총(三室塚)
⑤ 장천1호분(長川一號墳)
⑥ 오회분5호묘(五灰憤五號墓)
⑦ 오회분4호묘(五灰憤四號墓)

4. 벽화고분의 분포와 조사

5. 나오며

6. 참고자료

본문내용

m, 남북길이 3.56m의 장방형이며 바닥에서 천정까지의 높이는 3.94m이다. 널방 천장구조는 크기가 다른 삼각석을 겹으로 쌓아 올린 2단의 삼각고임으로 다는 무덤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특이한 구조이다. 널방은 잘 다듬은 화강암제 판석으로 쌓았으며 바닥에 세 개의 관대가 놓여 있다. 석면위에 직접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西神이다.
⑦ 오회분4호묘(五灰憤四號墓)
중국 길림성 집안 현 태왕향 우산촌에 있다. 인접한 오회분5호묘와 함께 오 분으로 불리는 통구평야 중앙부의 5기의 대형 흙무지돌방무덤 가운데 정식조사에 의하여 벽화가 발견된 무덤의 하나이다. 1945년 이전 일본인학자들에 의한 이 일대 고분들에 대한 조사 및 발굴시에는 서강61호분이나 통구 미편호분(未編號墳)으로 불렸다. 1950년의 개략적인 조사 때에 무덤안에 벽화가 있음이 알려졌다. 1962년 길림성박물관과 집안현문물보관소에 의한 전면 재조사되었다. 중국측의 공식명칭은 집안 통구고분군 우산묘구 제 2104호묘(JYM2104)이나 일반적으로 오회분4호묘로 불린다. 무덤의 외형은 절두방추형이며 둘레 160m, 높이 약8m이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칸무덤으로 무덤칸의 방향은 동으로 30°기운 남향이다. 널길이 널방남벽의 동편에 치우쳐 설치된 널길編東式이다. 널방크기는 동서너비 4.2m, 남북길이 3.68m, 천정높이 3.64m이며, 천장구조는 2단 삼각고임이다. 널방바닥에 세개의 돌관대가 놓였고, 남벽의 서측 벽에 잇대어 돌상이 설치되었다. 석면위에 직접 벽화를 그렸으며 벽화의 주제는 西神이다.
4. 벽화고분의 분포와 조사
집안지역의 고구려 벽화고분은 1907년 프랑스의 고고학자 샤반느 E. Chavannes가 산연화총(散蓮花塚)에서 벽화를 발견하고 1908년 이를 학계에 소개하면서부터 그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만주지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일본학자들에 의한 환인. 집안일대의 고구려 고분조사가 본격화하자, 이 일대의 벽화고분이 잇달아 발견 보고되었다. 1913년에는 산연화총이 다시 조사되었고, 삼실총, 귀갑총, 미인총, 오회분5호묘 등이 발견, 조사되었다. 이어 1935년에는 각저총, 무용총, 모두루총, 환문총, 사신총 등이 조사, 보고되었으며, 1937년에는 통구 12호분이 벽화고분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1945년 이전에 이루어진 집안지역의 고구려 벽화고분 조사는 전문인력의 참여 아래 시일을 두고 체계적, 과학적으로 이루어지기보다는 널길 입구를 통해, 혹은 널방 천정 뚜껑돌을 들어낸 자리로 무덤칸안으로 들어가 내부구조와 벽화내용을 살펴보고 이를 촬영한 다음, 철수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주의한 조사방식에 더하여 조사후의 보존조치도 전혀 뒤따르지 않았다. 때문에 무덤안의 벽화는 외부공기와의 급격한 접촉, 습기의 침투 등으로 말미암아 쉽게 변색, 퇴색될 뿐아니라 벽화가 그려진 백회가 떨어져 나가 원형이 파괴되는 경우가 많았다.
1945년 이후 집안지역의 고구려 벽화고분은 중국학자들에 의해 발견, 조사되었다. 1950년에는 오회분4호묘가 조사되었고, 1963년 하해방31호분, 1964년 산성하983호분 무덤칸에 벽화가 있음이 알려졌으며, 1966년 집안 통구고분군이 일제히 조사되는 과정에 산성하332호분, 만보정1368호분도 벽화고분임이 확인되었다. 1970년 장천1호분, 1972년 장천2호분, 1974년 돌무지무덤인 우산하41호분에서 벽화가 발견되었으며, 이어 1988년에는 장천4호분과 산성하절천정묘, 1992년에는 환인 미창구의 장군묘가 벽화고분임이 보고되었다.
중국학자들에 의한 고구려 벽화고분 조사도 부분적으로는 고분벽화의 과학적 보존을 고려하면서 진행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벽화고분의 1차 발견 이후 2-3차례에 걸쳐 추가조사 및 실측, 촬영, 일부 벽화고분의 일반공개를 행하면서 무덤칸 내부와 외부의 온·습도 차이로 말미암은 결로현상 발생을 고려한 과학적 보존조치를 취하지 않아 벽화의 퇴색, 백회의 박락이 촉진되고 있는 것, 이같은 현상의 발생을 막고자 벽화표면에 화학안료막을 입혀 벽화층의 내부로부터의 부식이 가능케 된 것 등은 벽화보존상 특히 우려되는 부분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의 고분군별 분포현황은 아래와 같다.
지 역
벽 화 고 분


고분군






하해방 고분군
3
모두루총, 하해방31호분, 환문총
우산하 고분군
9
우산하41호분, 각저총, 무용총, 통구12호분, 산연화총, 삼실총, 통구사신총, 오회분5호묘, 오회분4호묘
산성하 고분군
5
산성하332호분, 산성하983호분, 미인총, 산성자귀갑총, 산성하절천정묘
만보정 고분군
1
만보정1368호분
마선구 고분군
1
마선구1호분
장천 고분군
3
장천1호분, 장천2호분, 장천4호분
소계
22
환인군
미창구 고분군
1
미창구 장군묘
소계
1
총 계
23 (현존 20기, 보존미확인3기)
5. 나오며
고구려의 여러가지의 자랑스러운 특색 중에서 이 글에서는 고분벽화에 대해서만 언급하였다. 앞에서 언급한 고구려의 벽화는 박진감 넘치는 정리된 화면, 대조적인 색채의 과감한 사용과 자신 있는 색채 감각, 대상묘사의 치밀하고 완벽한 처리와 세련미 등은 고구려의 높은 회화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결코 빠지지 않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그러나 작금에 와서 우리들은 어떠한가 ?
고구려 고분미술
물질문화가 발달한다고 해도 정신적 지주가 사라지면 그 문화는 살아 있는 문화가 될 수 없고 종속적일 수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귀중하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하루빨리 우리 모두의 자기반성을 통하여 역사에 대한 좀더 올바른 지식과 인식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문화를 더욱더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다.
6. 참고자료
한국 미술사 김원용, 안휘준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3.6.10
동아원색 세계 백과사전 동아출판사 1991.6.1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한국정신 문화 연구원 1991.12.30
전호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 사계절출판사, 2000
신형식, 국사편찬의원회 위원, <고구려 고분벽화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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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08
  • 저작시기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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