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요약]슬픈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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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0. 작가 소개

+구조주의에 대한 보충설명

+직선적 역사관에 묻힌 문화상대주의

1부.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레비-스트로스가 마르세유로부터 밀선을 얻어 타고 뉴욕으로 밀항하기까지의 과정과 추억담들...

2부.
그에 앞서 1934년에 그가 브라질 상파울로 대학의 사회학 교수에 취임하게 되는 과정과 그가 어떻게 민족학자가 되었는지 설명.

3부.
항해과정이 게속되어 적도 부근의 무풍대를 통과하면서 느낀 여러 감상들.

4부.

5부. 카두베오족
17. 파타나
18. 판타날
19. 날리케카두베오족의 수도인 날리케는 과이쿠루스로부터 약 150킬로 쯤 떨어져 있으며 말을 타고 가면 사흘이
20. 원주민 사회와 그 형태

6부. 보로로족
21. 황금과 다이아몬드
22. 선량한 미개인
23. 죽은 자와 산 자

7부. 남비콰라족
24. 잃어버린 세계
25. 황야에서

*투피 카와이브족
37.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
38. 럼주 한잔
39. 탁실라의 유적
40. 챠웅(불교 사원) 방문

본문내용

인도종교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탁실라의 유적들은 그 명성해 비해 남아있는게 적은게 사실이다. 보존상태가 좋았던 불상같은 것들은 이미 박물관들로 옮겨져 지금 남아있는 것은 복제품들이다. BC 6세기경 그 지역의 사람들은 점차로 카스트제도에 대한 힌두교의 해석에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 때 크샤트리아왕의 아들인 '부다'가 모든 인간에 대한 평등을 가르치자 그의 가르침은 빠른 속도로 인도아대륙의 북쪽지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거의 유사한 시기에 페르시아의 아키메니드제국의 가장 동쪽주인 간다라는 그 지역의 가장 유력한 지역이 되었다. 그곳의 두 도시 푸쉬칼라바티와 수도 탁실라 등은 문명과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인도 최초의 고대 통일제국을 세운 왕조 시조는 찬드라 굽타이다. 마우리아라는 이름은 '공작’을 뜻하는 속어에서 유래된다고 전해지며, 한역 불전에서도 ‘공작왕조’라 번역된다. BC 4세기경, 인도의 마가다국은 난다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때 알렉산더대왕의 북서 인도 침입은 인도인의 통일제국을 낳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알렉산더대왕이 원정을 끝내고 철수한 뒤인 BC 317년경, 찬드라굽타는 북서 인도의 인더스강 상류지역에서 군사를 일으켜 마가다의 난다왕조를 무너뜨리고 마가다 국왕이 되었다. 그는 인접 여러 나라를 평정하여 거의 인도 전역에 걸친 통일국가 마우리아제국을 형성하였다. 그의 통치는 24년 동안 계속되었고, 아들에 이어 손자 아소카가 왕위를 계승하여 36년간 통치하였는데, 이 시대가 왕조의 최성기로 알려져 있다. 그 영역은 아소카 비문의 발견 장소에서 추정컨대, 동쪽은 칼링가국의 벵골만 연안, 남쪽은 북부 마이소르, 서쪽은 소파라·사우라스트라, 북서쪽은 탁실라, 북쪽은 히말라야 산록까지 미치는 광범한 지역이었다. 이 광대한 영토는 군이라고 하는 행정구역으로 구획되고, 군에는 최고의 실권자로서 태수가 임명되었다. 특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나 변경에는 왕자나 왕족이 태수로 파견되었다. 치안과 조세징수를 포함한 광범한 행정권이 주어진 태수는 종속된 현의 장관으로 독립·자립의 지배자로서의 권한을 지닌 현령을 임명했는데, 그것이 아소카 왕 사후 제국의 분열과 붕괴를 가져온 중요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로, 각 지방의 태수들을 감독하고 지방의 정보를 군주에게 직접 보고하는 관리와 밀정들이 수도 파탈리푸트라에서 전국에 파견되어 중앙집권적인 통제도 시도되었다. 이러한 조직과 제도 밑에서 왕은 다르마(보편적 윤리)에 의거한 고대 제왕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려고 하였으나, 아소카왕의 사망으로 세력을 잃고 BC 180년 최후의 왕 브리하드라타의 장군 푸샤미트라에게 멸망당하였다.
40. 챠웅(불교 사원) 방문
레비-스트로스는 이슬람안에서 자신의 고향 세계를 재발견하게 된다. 즉 이슬람, 그것은 동양의 서양이다. 이슬람이 서양 문명의 모습을 보여 줄 뿐 아니라 프랑스가 얼마나 이슬람화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이슬람은 지금으로부터 7세기전 그 당시 사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를 유효적절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이슬람과 불교가 제각기 다른 방법으로 동양의 기반에 대항했을 것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들 상호간에도 대항해왔다. 만일 영원한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것일 것이다. 그것은 오천년 전의 것이라고도 또 어제만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피라미드에 속한다고도 또 서양문명이 들어가 살고 있는 집에 속한다고도 할 수 있다. 불교는 원시 신앙의 탈선 행위들을 억제하고 모태로의 복귀의 약속이 내포하고 있는 통합에 대한 보장을 해줌으로써 불교는 에로티시즘을 광란과 오뇌로부터 해방한 후에 재차 포용하는 것이다. 반대로 이슬람교는 남성지향에 따라 발전했다. 즉 불교는 그 평온을 하나의 융합, 즉 여성과의 융합, 인류와의 융합으로써, 그리고 신격의 무성적인 표상속에서 포착하려 한다. 성현(붓다)과 예언자(마호메트)는 둘다 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이다. 그밖에 모든 점에서 그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의 고찰 대상은 붓다의 인도, 마호메트 이전의 인도이다. 사실 이 두 세계간의 거리는 두 세계중 어느 하나와 이슬람 교도들의 시대착오 사이의 거리보다 더 가까운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무굴 예술의 양의성은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이 일으키는 감동에는 건축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시와 음악의 영역에 속하며 이슬람 예술은 몽환 예술로만 남았어야 하는 것이다. 인도의 사원에서는 우상이 신을 표방한다. 이와 같은 사고법에 대한 이슬람교와 불교간의 반응은 서로 다르다. 전자는 우상을 배척하고 파괴하며, 후자는 화상으로 우상을 대치시키되 그 수를 얼마든지 늘리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도들이 도덕성이라는 문제에 대해 부여했던 역사적 해결 방식은 하나의 냉정한 양자택일에 도달하였다. 부정, 빈곤, 재난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해서 어떤 중간적인 해결책이 제공된다. 우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다른 인간들에 대해 전혀무관심하거나 또는 모든 인류에 대해 우리들 스스로가 죄를 짓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점에서 불교는 완전하게 일관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밖으로부터의 호소에 응답할 수 있다. "세계는 인간이 없이 시작되었고, 인간 없이 마칠 것이다. 내가 일생을 바쳐서 목록을 작성하고 또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될 제도나 풍습, 관습들은 만약 이것들이 인간성으로 하여금 그것의 운명지어진 역할을 수행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면 전혀 무의미해지고 마는 어떤 창조적 과정에서의 개화이다. 그러나 그 역할은 우리 인간에게 어떤 독립적인 위치를 배당하지는 않는다." 나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결코 하나의 개인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머릿속에 밀집되어있는 수백만개의 신경세포로 이루어진 사회와 그 사회에 하나의 로봇으로서 봉사하는 나의 내체 간의 투쟁에 끊임없이 관여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즉 개인이 집단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또 각 사회가 여러 사회들 가운데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도 우주 속에서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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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1.29
  • 저작시기20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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