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 대한 기본정보와 최근이슈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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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일본의 기본정보

1. 일본의 자연
1) 일본의 지세
2) 일본의 기후

2. 일본의 정치
1) 일본의 천황제
2) 일본의 국회
3) 일본의 내각
4) 일본의 지방자치
5) 일본의 정당
6) 일본의 외교
7) 일본의 군사

3. 일본의 경제

☉ 최근 일본의 이슈

본문내용

역문제들에 대한 적극적 역할을 하고 있다.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진출을 포함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강화를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7) 일본의 군사
일본은 헌법으로 전쟁을 포기하고, 육해공군의 전력을 보유하지 않을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원칙은 1950년의 6·25전쟁 발발 직후 맥아더 사령부의 지시에 의해 7만 5000명의 경찰예비대가 설치됨으로써 파기되었다. 1952년 미일 안보조약이 발효되자 일본은 미군의 주둔을 인정하는 한편 일본의 재군비 의무 때문에 일본군대는 미국의 원조에 의해 점차 증가되었다.
경찰예비대는 1952년 보안대(保安隊)가 되고, 1954년 자위대(自衛隊)가 되어 명실상부한 군대로 변모하였다. 1960년의 안보조약 개정으로 자위대는 일본의 방위뿐만 아니라 재일미군(在日美軍)의 방위의무를 지게 되어, 미국의 핵우산 밑의 안보체제 하에서 일본은 급속한 군비증강을 이루어왔다. 총병력 약 24만 명으로 이 가운데 육상자위대가 14만 8676명, 해상자위대가 4만 4217명, 항공자위대가 4만 5377명 등으로 세계 유수의 군대로 성장하였다. 2001년 현재 국방비는 461억 달러이다.
3. 일본의 경제
전쟁에 패배한 일본의 경제는 해외 식민지·시장의 상실과 생산설비의 파괴로 인해서 붕괴되었다. 그러나 대전 후에 실시된 농지개혁이 종래의 소작농 중심의 농업을 자작농 중심의 농업으로 바꾸어 농촌시장의 확대를 가져왔고, 또 파업권 획득으로 정치적·경제적 지위가 높아진 노동자들이 도시소비시장의 확대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두 잠재적 소비시장의 확대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 한국의 6·25전쟁이었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군사보급기지로서의 일본에 특수경기(特需景氣)를 낳게 하여, 중화학공업·경공업에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자극을 주었다.
그리고 반공 자유진영의 일원으로서 국제시장에 복귀하는 속도도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부흥하기 시작한 일본경제는 1974년까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성장률을 보였다. 그와 같은 고도성장의 원인은 전반기에는 주로 농업인구의 급속한 도시유입에 의해 구미 제국보다 값싼 노동력을 써서 가격경쟁에 임할 수 있었다는 점과 달러화(貨)와 엔화[円貨]의 환율이 안정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후반기의 고도성장의 원인은 산업합리화, 기술혁신, 대형투자 등에 의해 일본제품의 국제경쟁력을 높여서 수출을 신장시켰다는 점에 있었다. 모든 산업에 오토메이션을 중심으로 한 기술혁신이 실시되고 1956~1970년까지의 기간에 주요산업의 시설투자는 7배로 늘었으며, 특히 1965년 이후부터는 국제수준을 상회하는 대형투자가 전개되었다.
수출신장은 특히 1956년 이후의 일본경제의 고도성장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1969년에 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은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위로 비약하였다. 1970년대 후반에 40년 만에 닥친 세계경제의 경기후퇴의 파동은 일본경제에도 장기적이고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 동안 미국이나 유럽 국가의 심한 인플레이션에 의해 일본제품이 국제적 우위에 설 수 있었으나 오늘날 그들 구미 제국의 관세정책으로 해서 일본은 제품의 생산기지를 일본 국내에서 세계 각국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적인 경기후퇴의 파동 속에서 일본 제품의 국제적 점유율을 더욱 높이겠지만, 일본의 국내시장 확대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일본경제는 구조적·장기적인 경기침체를 면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1991년부터 후퇴하기 시작한 일본경제는 순환적 경기후퇴에 거품경제의 붕괴에 따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2000년대에 들어서도 불황이 계속되고 있어 공공부문 투자 확대와 같은 경기 부양책을 실시하고 있다.
최근 일본의 이슈
탈북 일가족 4명, 쪽배 타고 일본에
폭 1.8m 나무배로 일주일간 900㎞ 넘게 사투
“붙잡히면 죽으려 해” 독약 지녀… 한국行 합의
지난달 27일 밤 북한 청진을 탈출한 일가족 4명이 지붕이 없는 소형 목선으로 900㎞ 이상을 항해해 2일 새벽 일본 아오모리(靑森)현 후카우라(深浦)항에 도착했다. 길이 7.8m, 폭 1.8m의 목선에는 경운기에 사용하는 작은 엔진 2개와 플라스틱 기름 탱크, 길이 3~4m의 노(櫓), 독약이 든 앰풀(유리병) 등이 실려 있었다.
이들은 일본 경찰에 발견된 직후 “생활이 힘들어 탈출했다. 지금 체제에선 인민이 먹을 수 없다. 자유를 찾아 일주일에 걸쳐 왔다. (한국과 북한의) 국경 경비가 삼엄해 일본으로 향했다. 북한 당국에 체포되면 죽으려고 했다.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3일 “인도적 관점에서 대응할 것을 약속한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은 이날 “일본과·한국 정부가 이들을 한국에 보내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탈북자 가족은 부부인 50대 후반 남성과 60대 초반 여성, 아들인 30대와 20대 후반 남성 등 모두 4명이다. 아버지는 어부 출신, 장남은 전문학교 학생, 차남은 문어잡이 어부이며 모두 북한 공민증(公民證)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처음 발견된 것은 2일 새벽 4시10분. 후카우라항 인근에서 낚시를 하던 일본인이 “수상한 배와 사람이 보인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아오모리현 경찰과 해상자위대는 헬리콥터를 띄워 이들을 부두로 유도했다.
▲ 2일 오전 일본 아오모리현의 아지가사와 경찰서에서 경찰들이 탈북자들이 타고 온 목선을 조사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들은 북한 만경봉호가 입항해온 니가타(新潟)를 향했으나 일본 열도를 따라 북상하는 쓰시마(對馬) 해류에 밀려 아오모리 앞바다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진항에서 후카우라항은 직선 거리로 900여㎞에 달한다.
일본 언론은 “다행히 최근 며칠 동안 (동해에) 파도가 세지 않았다. 바다가 거칠었
으면 배가 전복돼 모두 목숨을 잃을 위험성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발견 당시 이들의 건강 상태는 비교적 양호했다.
북한을 탈출한 주민이 선박을 이용해 일본에 도착한 것은 1987년 1월 20일 ‘따뜻한 남쪽 나라’로 유명한 김만철씨 일가(11명) 이후 20년 만이다. 김만철씨 가족도 청진을 출발해 동해를 끼고 있는 후쿠이(福井)현에 도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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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2.01
  • 저작시기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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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49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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