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인(1472~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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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교화하였다. 양명은 용장에서 생활하면서 묘족의 말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고, 굴을 파서 사는 그들에게 집 짓는 방법과 학문을 가르치게 된다. 그 결실들은 양명이 하루헌 군자정 빈양당과 같은 집은 물론 서당에 해당하는 ‘용강서원’을 짓는 것으로 나타난다. 용강서원은 양명이 손수 창건한 최초의 서원으로 양명 사후에 양명사로, 다시 왕문성공사로 바뀌어서 현재에 이른다. 그는 서원에 앉아 독서를 하고 또 원주민의 말을 배워서 그들을 교육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순박한 주민들은 그의 인품에 감화되었고 용강서원에 모여드는 젊은이들이 날로 많아 졌다. 용장의 용강서원은 바로 양명학 발상의 성지인 셈이다.
전주와 사은의 묘족을 무혈로 평정한 양명은 학교를 세움으로써 교육을 통해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또한 남녕의 인심이 나빠지고 유학자들도 학문을 게을리 하여 사회 풍속이 나날이 퇴락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양명은 그곳에 학교를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각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하였다. 자신이 직접 가서 강의하기에 힘든 벽지에는 책임교사를 보내 예절 교육을 하게 하는 등 학생들의 교화에 힘쓸 방책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양명은 부문서원을 세우고 자신의 제자에게 교육을 책임지게 했다. 그만큼 그는 교육에 희망을 걸고 열성을 다하였다.
2) 『전습록』
『전습록』은 문답체로 되어 있다. 문답체는 이론적 논리적인 문장이나 사색 사유의 결과 또는 결론만을 기술한 것이 아니고 문답이 영위되는 그 장소의 생생한 정황이나 인물의 양태가 숨김없이 잘 묘사되어 있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흥미를 느끼게 한다. 『전습록』의 문답은 제자가 단순히 스승의 말씀을 듣는 형태가 아니다. 제자들은 스승의 답을 납득할 때까지 반복하여 질문하며, 양명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차근차근 열의를 갖고 대답한다. 스승과 제자들의 문답 사이에서 화기애애하고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딱딱한 틀에 얽매임 없이 생각이 향하는 대로 질문하고 또 이에 대답하는 것은 참으로 드문 예이다. 전통적으로 제자가 스승에게 질문할 때 쓰여지던 표현 방식인 “감히 묻겠습니다”, “청하여 묻겠습니다” 등의 존경심과 권위에 의해 제한된 사유의 표출 방식은 찾아보기 힘들다.
3) 강연과 토론
왕양명은 당시 명대 사회에서 지방의 사립학교와 향약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강연과 토론을 통해 문화 학술이 일반 대중들에게 침투되어가는 경향을 촉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며, 바로 그 점이 그의 자유주의적, 자율적 학교 및 교육관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사이트
박연수, 『양명학의 이해』, 집문당, 1999
최재목, 『내 마음이 등불이다』, 이학사, 2005
장성모, 『주자와 왕양명의 교육이론』, 교육과학사, 1998
http://cafe.naver.com/munwha3.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0
http://blog.naver.com/ttlgirl83?Redirect=Log&logNo=2001975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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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2.26
  • 저작시기2008.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5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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