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삶과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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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도전의 삶과 사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반골 기질의 불순분자

2.출생의 비밀

3.체두변발을 한 시골청년에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4.토지공개념의 시초

5.적과의 동행, 정몽주와 정도전

6.서울을 만든 사람들

7. 천하 경륜의 꿈

8.솟아오른 용은 반드시 후회한다

9.요동정벌을 향하여

10.가장 큰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

11.나라를 세울 적에 그의 꾀를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본문내용

를 방지하고 어디까지나 유신(儒臣) 중심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는 특히 이방원과 이방번의 존재를 매우 불안하게 생각하여 이 두 사람의 사병을 해체시키고 방원은 전라도로 방번은 동북면의 절제사로 좌천시키려고 생각하였다. 사실상 숙청인 셈이었다.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왕족들과 공신세력은 점차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자칫 잘못되면 숙청 대상으로 지목되어 목숨까지 위태로울 판이었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건국의 제 1의 공신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이방원 역시 그런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특히 권력이란 것은 도대체 다른 힘있는 권력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법이었다.
이방원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도전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지, 아니야. 그자는 아버님에 이어 어떻게 해서라도 2인자의 자리를 내놓으려고 하지 않지. 아마 조상에 노비의 피가 섞여 있다는 부담감이 그를 무한대의 구너력욕으로 몰고 있는게 분명해. 더구나 그자의 칼날은 나에게 겨누고 있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그자의 칼에 내가 죽게 돼."
하륜은 원래 방탕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예천군수로 있던 그는 매일같이 기생만 끼고 유락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이방원의 집에서 열린 잔치에 와서는 술을 잔뜩 먹더니 갑자기 이방원에게 술잔을 끼얹는 것이었다. 이방원이 크게 화를 냈다.
"아니, 이게 무슨 망칙한 짓이오?"
그러자 하륜은 이방원을 데리고 용서를 빌 듯 따로 자리를 잡더니 문득 진지한 태도로 돌변해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일을 벌여야 합니다. 그대로 있다가는 정도전에게 먼저 당합니다. 안산군수로 있는 이숙번이 제법 쓸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불러 올려서 당장 칩시다."
정도전이야말로 여말선초의 난세에서 일개 하급관리로부터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그 앞에서 정몽주도 하륜도 조민수도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러나 이방원 역시 지략과 행동력을 갖춘 야심가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왕실의 실력있는 왕자였다. 결국 그와 같은 이방원과 맞서야 했던 것이 정도전에게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1398년 8월 이성계가 병석에 눕자 자나깨나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이방원은 즉시 사병을 동원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이른바 '왕자의 난' 혹은 '방원의 난' 또는 '우인정사'라 불리는 피비린내나는 혈전이었다.
드디어 새벽 2시, 정도전 일파는 그 시각 남은의 첩이 사는 집에 모여 불을 환하게 밝힌 채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 이 순간 이방원이 기습해왔다. 원래 사병이 혁파되는 과정에서 왕자들은 모든 무기를 반납해야 했다. 하지만 이방원의 아내 민씨는 그때 철창 등을몰래 감추고 있었다. 그래서 이방원의 부하들은 아쉬운 대로 그 무기들이나마 갖추고 떠날 수 있었다. 물론 하륜이 끌어들인 이숙번의 군대도 합류하였다.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먼저 이웃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정도전 등은 허겁지겁 집 밖으로 나왔다. 이방원의 부하들은 즉시 정도전을 붙잡아 이방원의 앞에 무릎을 꿇렸다.
"공이 지난번에도 나를 살렸으니, 이번에도 다시 한 번 나를 살려주시오."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애원하였다. 지난번이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였던 일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단호하였다. 그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흐르는 듯하더니 즉시 목을 치라는 추상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이렇게 하여 일세의 풍운아, 정도전은 비명에 죽고 말았다. 정도전의 라이벌이며 그간 눌려지내던 조준과 하륜은 이방원의 곁에서 그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때 방원은 살생부에 오른 인물인 남은, 박위, 장지화 등 정도전 파들을 모조리 살해했다. 막내아들이자 세자인 방석은 겁을 먹고 궁궐을 빠져나가 도망을 치다가 이방원 부하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사병혁파가 시작된 지 불과 17일 만의 일이었다.
태조는 이 사건에 크게 격노하여 왕위를 내놓았다.
한편 명나라 태조 주원장도 그해 윤5월에 사망하였다. 이렇게 하여 양국을 긴장시키던 정도전과 주원장, 두 사람은 역사의 장에서 사라졌다. 그러면서 양국의 관계도 비로소 정상화 되었다.
정도전은 역적으로 몰려 지금까지도 그의 시체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그의 묘소는 전혀 찾을 길이 없다. 그러다가 그가 죽은 후 5백년이나 지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 경복궁을 설계하였던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비로소 그를 복권시켰다.
왕자의 난에서 승리를 거둔 방원은 그렇다고 곧장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우선 둘째형 이방과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 절차를 밟았다. 그가 바로 정종이었다. 그러나 정종은 허수아비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역시 왕위에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던 넷째,방간은 방원을 제거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정종이 왕위에 오른지 1년이 되었을 때, 마침내 두 왕자는 부딪쳤다. 그리하여 송도에서 때아닌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방간은 결국 체포되어 토산으로 유배되었고, 이방원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11.나라를 세울 적에 그의 꾀를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젊은 날의 고초가 없었던들 정도전은 그저 평범한 인물로 살다 갔으리라. 만약 정도전이 없었다면 이성계가 그토록 쉽게 천하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은 마치 유비과 공명을 얻은 것과 같았다.
정도전은 늘 자기를 장량에게 견주었다. 확실히 창업에 성공할 때까지는 두 사람의 행적이 꽤나 비슷했다. 하지만 창업 이후의 처신에 있어서는 두사람이 매우 달랐다. 그리고 결과도 달랐다.
사실 정도전도 이러한 운명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는 불행히도 한나라의 여러 충신같은 인물들이 없었다. 오직 정도전만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물러설 때를 놓친 것이다.
태조실록 에는 정도전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세울 적에 그의 꾀를 쓰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국량이 좁고 시기심이 많았으며
또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해치고자 하였다. 그리고 묵은 감정을 반드시 갚으로 하였다.
자신이 건설한 한양에서 가장 먼저 죽어야 했던 조선 제1의 개국공신 정도전. 지금 그는 서울의 희뿌연 하늘에서 무얼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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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4.22
  • 저작시기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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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6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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