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공화정의 성립과정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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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초기 로마 공화정(共和政)의 성립과정
(1) 왕정(王政)시기와 쿠리아회(comitia curiata)
(2) 병사회(百人組會)의 출현
(3) 공화정 초기
2. 신분투쟁과 공화정의 성립
(1) 로마의 팽창과 내부적 불안
(2) 신분투쟁과 공화정의 발전
(3) 로마 공화정의 구조
3. 로마 공화정의 의의와 영향

Ⅲ.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관들 또한 원로원의 조언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집정관을 거치면 그 자신도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반해 민회는 소집되는 형태로 운영되었으며 실질적 결정이나 토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회는 사실상 시민의 의견을 듣고 투표를 진행하는 모임이었다. 시민은 정치적인 문제에 의견을 낼 기회를 가지기는 했지만 실제적으로, 정치가들이 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는 비공식적인 모임에서 어떻게 투표할 것인지 만을 결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회를 주재하는 호민관의 지위는 강력한 것이었다. B.C.287년 이후 선전포고와 평화조약의 인준, 새로운 감찰관 집정관 혹은 법무관을 뽑아야 하는 등의 특별한 업무에 관해서만 병사회가 소집되었고 다른 모든 문제들은 평민회에서 주관했기 때문이다.
3. 로마 공화정의 의의와 영향
로마의 공화정은 이렇게 2세기 간에 걸친 평민-귀족간의 투쟁을 통해 성립되었다. 3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로마 공화정 성립과정에 있었던 경과를 다시 한번 고찰하면서 그 의의와 영향을 밝히고자 한다. 먼저 로마의 민회 중 병사회에 관한 것을 살펴보면 로마 공화정의 특징을 한 가지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재산을 기준으로 한 이원적 정치구조이다. 병사회가 후대로 가서는 병력 집단의 의미는 퇴색하고 정치집단으로써의 성격이 더 강해진다는 것은 이미 언급했거니와 재산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의사결정권이 실질적으로는 귀족이나 일부 부를 축적한 평민들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병사회 각 계급의 수는 크게 달랐는데 상위계층은 100명이 채 안되는 인원이 한 개의 백인조(組)를 구성하고 선거권을 가졌지만 하층계급은 한 조가 1000여 명에 이르기도 했다. 12표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성문법에 의한 입법을 바라는 평민들의 요구에 12표법이 제정되었지만 그 귀족들이 주축이 되어 성립되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특권을 옹호 내지는 기존의 평민들의 불만을 제대로 수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채무법, 귀족과의 통혼금지 조항 등) 이것들은 뒤이은 투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당대에는 귀족 평민 간에 12표법으로써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다. 따라서 리키니우스법을 거쳐 호르텐시우스법으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은 평민들의 끈질긴 투쟁 못지않게 로마 지배층들의 고도의 정치적 수완을 볼 수 있는 예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일련의 투쟁의 흐름은 그 자체가 일면 대단한 정치적 개방이자 변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예로 고위 정무관직을 평민들에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모두 보수가 없었기 때문에 안정된 자기 수입을 가진 소수의 부유층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것을 귀족과 평민간의 신분차별의 대표적 규정이었던 혼인금지 조항이 파기 되었지만 실제로 귀족과 혼인할 수 있었던 것은 부유한 평민층 소수였다는 점과 연결지어 생각할 때 실제 이론상의 법과 적용상에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병사회이건 상위 정무관직의 역임이건 귀족이 아니면 상류 평민층이 정치의 실질적 주도 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모든 시민들에게 정치 참여의 권한이 보장되었다. 또 긴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평민들의 요구도 모두 수용되었다. 서론에서 로마는 이탈리아 통일로 가는 과정과 함께 로마 공화정의 성립과정이 전개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로마가 지속적인 정복전과 기본적 수비를 위해서는 평민의 군사력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평민들은 과도한 부담을 감내해야 할 뿐, 실질적으로 누리는 것은 없었다. 만약, 로마의 지배층이 신장해 가는 평민층의 요구와 확장되는 로마의 현실을 올바로 꿰뚫어 보지 못하고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평민들과 대립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로마는 내분과 혼란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번영과 제국의 성립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 로마 지배층들은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지 않고 평민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보장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일부 상부계층만을 포섭하는 고도의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평민들로부터는 로마에 대한 충성과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정치적으로는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과정에 있어서도 결코 한번에 많은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고위 정무관직들의 개방에서 보았듯이 평민들의 요구에 있어서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타협하면서도 꾸준히 오랜 시간을 두고 양보하여 마침내 일정 선에서 대 타협을 보았고 그것이 바로 호르텐시우스법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로마 공화정의 성립은 단순히 평민의 의식 신장과 조직적인 신분투쟁의 산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로마 지배계층의 뛰어난 정치력도 크게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비록 결과론적이지만 이것은 로마 사회를 하나의 일체감으로 공고히 단결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로마라는 거대 제국의 성립에 거대한 원동력이 되었다.
Ⅲ. 결론
이상으로 성산사건으로 시작하여 호르텐시우스법으로 마무리 된 2세기 간의 로마 공화정의 성립과정과 그 의의를 다루었다. 신분의 투쟁과 하층계급의 정치적 성취를 지켜봄에 있어서 일견, 하부계층의 요구나 필요에만 집중하여 상부계층의 영향이나 노력을 간과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까지의 서술이 공화정의 성립과정에 있어서 어느 쪽이 공이 큰가를 논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자신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투쟁을 2세기 간이나 이어간 평민들 못지않게, 매 순간마다 적절한 타협과 양보로써 국가를 통치하고 유지시켜나간 로마의 지배층들의 지혜는 로마라는 천년의 제국이 어떻게 성립 유지 될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격심한 계급투쟁이나 유혈혁명 또는 내분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적 타협을 이끌어낸 지배 계급의 현명한 통치 감각은 오늘날 분쟁과 이권이 너무도 많은 우리 사회에도 큰 귀감이 된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허승일, 『로마공화정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8.
車河淳, 『西洋史總論』 서울 : 探求堂, 1999.
세계역사연구회, 『세계사』 서울: 오상, 1999.
배영수 『서양사강의』 서울 : 한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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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8.11
  • 저작시기20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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