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구소련][소련][러시아의 역사][구소련의 붕괴 과정][러시아혁명]러시아의 역사와 구소련의 붕괴 과정 및 러시아혁명 심층 분석(러시아의 역사, 구소련의 붕괴 과정, 러시아혁명, 러시아, 구소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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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구소련][소련][러시아의 역사][구소련의 붕괴 과정][러시아혁명]러시아의 역사와 구소련의 붕괴 과정 및 러시아혁명 심층 분석(러시아의 역사, 구소련의 붕괴 과정, 러시아혁명, 러시아, 구소련)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러시아의 역사
1. 고대 러시아
2. 몽고의 침략과 모스크바의 등장
3. 로마노프 시대
4.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
5. 러시아혁명
6. 소비에트 시대

Ⅲ. 구소련의 붕괴 과정
1. 발트 3국의 독립 선언
2. 옐친의 공산당 탈당
3. 8월 쿠데타

Ⅳ. 러시아혁명과 공동체의식
1. 1905년의 혁명과 소비에트
2. 1917년의 혁명과 노동자 자율경영

Ⅴ. 러시아혁명의 실패
1. 제3인터내셔널
2. 독일 혁명
3. 실패의 이유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였다. 그들은 만일 사정이 허락한다면 혁명 세력의 본거지를 멀리 서쪽으로(아마도 베를린으로) 옮기는 일에 거의 전적으로 찬성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진정으로 국제주의적인 운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러시아적 기질을 버리고 독일인 동지들과 합세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제3인터내셔널 혹은 코민테른(Comintern)이 형성된 것은 이 같은 분위기에서였다. 당시 전개되고 있던 볼셰비키 혁명에 대한 그들의 견해 차이는 점점 커져서 일찍이 볼셰비키의 실험에 공감을 하고 있던 사회주의자들만이 모여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구성하였던 것이다.
2. 독일 혁명
중앙 유럽에서의 혁명의 호기는 볼셰비키의 큰 관심을 끌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일시적으로 볼셰비즘이 성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혁명이라고 하기에는 빈약한 승리였고 혁명으로 가는 길에서 보면 사소한 실패였다. 베를린이 진짜 목표였다. 그곳이야말로 중앙 유럽의 볼셰비즘의 운명이 그리고 이와 함께 국제적 운동으로서의 공산주의의 장래가 걸려있는 지역이었다. 비록 독일이 전쟁이 끝나기 이틀 전에 공화제를 선포했지만, 독일 혁명은 기묘하고 부자연스럽게 도래하였다. 그러나 1919년부터 1923년의 기간 동안 독일 공산주의자들은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되풀이했다. 최초의 시도는 전쟁이 끝난 지 겨우 두 달 후인 1919년1월에 있었다. 그때는 베를린 시가지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 졌는고 시위 기간 중 독일 좌파의 가장 유능한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가 처형되었다. 마지막 시도는 히틀러가 최초로 권력을 잡으려고 하기 한 달 전에 Saxony와 Hamburg에서 있었다. 이두가지 시도 이외에도 사소한 혁명적 운동은 끊임없이 발생했다. 그러나 그런 운동들의 성격은 점차 변해갔다. 대중성 자발성을 상실하고 결국 정당의 관료주의가 모스크바의 지시 아래 혁명을 획책하는 방향으로 운동을 이끌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볼셰비키는 독일에서 결국 혁명이 실패하고 만 것을 보다 넓은 의미에서 국제의 운동이 실패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 실패는 부분적으로 그들 자신의 과오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지도자의 과오와 1920년 이후의 변화된 상황은 앞으로 10년 동안 유럽에서의 모든 혁명의 희망을 꺾어 버렸다.
3. 실패의 이유
코민테른의 제2차 총회는 회의에 참가한 정당들에게 \'철의 훈령\'을 부과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훈령이란 제3인터내셔널에 참가하는 데 필요한 \'21개 조항\' 을 말하는데 그 조항엔 참가 정당은 \'개선론자(reformists)를 추방해야만 하고 불법적인 운동에 참가해야 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적인 성향의 사회주의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조항으로 모든 유럽 사회주의 정당은 분열되었다. 결국 소수들만이 공산주의 정당을 만들어 제3 인터내셔널에 참가했다. 공사주의 정당을 지배한 것은 모스크바의 훈령이었다. 독일 혁명의 최종적인 실패와 3개월 후 레닌의 사망은 코민테른으로부터 국제주의적인 풍조를 거두어 가버렸다. 그 이후 국제 공산주의는 모스크바로부터의 관료주의적인 통제에 굴복해 버렸고 국제 공산주의의 생명은 망실(忘失)되었다. 그 지도력은 판에 박힌 듯했고 창의성을 잃게 되었다. 1930년대(파시즘과 대공황의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던 시기)까지 공산주의는 당원들과 수많은 동조자들을 고무시킬 수 있는 이데올로기적인 유연성과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Ⅵ. 결론
공산주의는 처음에 자본주의에 내재된 대중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제거하겠다는 웅대한 계획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많은 문제점들이 구태의연하거나 새로이 발생했다. 이 같은 문제점들을 놓고 볼 때, 발전에 관한 ‘체제의 효율성’과 ‘균형의 요구’사이에 내재된 본원적 모순은 바로 사회주의 모델이 갖는 자가당착적 핵심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 소연방의 장래를 정확히 예측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공화국간 경제공동체 조약체결과 집단안보조약의 체결을 위한 논의, 그리고 각 공화국간 경제적 상호보완관계 및 다민족성 등을 고려하여 상당히 유사한 그림은 그려볼 수 있다. 신연방형태는 대체로 국가연합과 연방의 중간형태인 느슨한 주권국가연방이 될 것이며 각 공화국은 국내 정책의 영역에 관한 한 독자적인 정책을 펴나갈 것이다. 그러나 연방의 장래를 좌우할 가장 중요한 변수는 경제문제이다. 소연방 해체를 가속화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독립추구였으며 8월의 쿠데타는 그것을 가능케 하였지만 그 동안 연방정부의 책임이었던 경제위기의 극복과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한 책임을 이제 정치적 주권을 회복한 각 공화국 정부가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70년이 넘도록 구조화된 중앙통제적 경제체제를 시장경제체제로 단시일 내에 전환한다는 것은 제도적인 요인과 인간적인 요인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런데 소련은 경제발전계획의 실행과정에서 산업을 지역특성에 맞추어 육성하여 왔고 지하자원이나 농산물생산의 분포가 각 공화국에 따라 다른 등, 각 공화국간 경제적 상호의존성이 높기 때문에 당면한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각 공화국간의 협력이 요구되고 있다. 소연방의 장래를 논의할 때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각 공화국의 경제발전의 정도와 종교, 교육수준, 문화 등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점이고, 15개 공화국이 정치적 독립을 얻었다고 해서 민족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러시아 민족주의 내지는 국수주의가 얼마나 억제되고 자제되면서 러시아 공화국이 타민족 공화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공존공영을 위하여 노력하느냐에 달려 있다.
참고문헌
김민제 - 러시아혁명의 환상과 현실, 서양근대혁명사 제 3부, 서울 역민사, 1998
빅또르 세르쥬 - 러시아혁명의 진실, 풀무질, 1996
쉴라 피츠페트릭 저·김부기 역 - 러시아혁명(1917~1932), 대왕사, 1990
이인호 엮 - 러시아혁명사론, 까치, 1992
임희완 - 서양사의 이해, 박영사, 1999
장진헌 - 러시아 문화의 이해, 학문사, 2005
한기영 - 러시아혁명의 해석, 제주대학교 출판부, 1998
한국슬라브학회편 - 러시아혁명기의 사회와 문화, 서울 민음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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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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