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6 25전쟁][남북통일][남북분단][전쟁]한국전쟁(6 25전쟁)의 배경, 한국전쟁(6 25전쟁)경과, 한국전쟁(6 25전쟁)성격과 한국전쟁(6 25전쟁)의 미국 개입 및 한국전쟁(6 25전쟁)의 결과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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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 25전쟁][남북통일][남북분단][전쟁]한국전쟁(6 25전쟁)의 배경, 한국전쟁(6 25전쟁)경과, 한국전쟁(6 25전쟁)성격과 한국전쟁(6 25전쟁)의 미국 개입 및 한국전쟁(6 25전쟁)의 결과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한국전쟁(6 25전쟁)의 배경

Ⅲ. 한국전쟁(6 25전쟁)의 경과

Ⅳ. 한국전쟁(6 25전쟁)의 성격

Ⅴ. 한국전쟁(6 25전쟁)과 미국의 개입
1. 최초의 반응
2. 개입결정과정
3. 전면개입과 북진

Ⅵ. 한국전쟁(6 25전쟁)의 영향
1. 한반도에 끼친 영향
2. 북한에 끼친 영향
3. 남한에 끼친 영향
4. 자유진형에의 영향
5. 공산진형에의 영향

Ⅶ. 한국전쟁(6 25전쟁)의 결과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끝날 무렵 1000개로 뛰었다. 한편, 공산 주의의 침략으로부터 공동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의식을 생겨 자유 진영 국가들간의 동맹 관계는 더욱 확고해 졌다. 이렇듯, 서유럽에서는 NATO체제가 강화되었고 태평양지역에서는 태평양 안보 체제가 구축되며 공산국가들에 대항하였다.
한국전쟁에서 최소의 희생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은 나라는 일본이었다. 미국은 극동아시아의 안보를 위하여 군사-경제적으로 일본을 성장시켜야겠다고 마음먹고, 일본의 무장을 허용하였으며,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공장이 세우고 기술을 도입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의 패망으로 침체되어 있던 일본의 산업은 호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호황속에서 일본은 수직 성장을 하였고, 이는 오늘날 일본이 세계 경제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한편 미국사람들은 한국전쟁이 소련의 \"붉은 음모\"라고 생각하며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로젠버그\'와 같이 공산주의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처형되었고, 정치-사회 모든 분야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은 축출되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전쟁은 세계 각 지역에서 자유 진영과 공산진영의 갈등을 고조시키며 냉전을 심화시켰다.
5. 공산진형에의 영향
한국전쟁이 공산국가에게 끼친 영향도 컸다. 한국전쟁이 발발 할 때, 중국은 나라를 세운 지 고작 1년을 조금 넘겼을 뿐이었다. 그들은 나라를 세우기 위해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쟁을 벌여야 했다. 결국, 미국의 원조를 받고 있었던 장개석을 중국 아래 쪽의 조그만 섬인 대만(Taiwan)으로 쫓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많은 불안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모택동은 한국전쟁을 이용하여 이러한 요소들을 해결했다. 그는 전시 체제 하에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숙청했고 권력을 강화하였다. 그러므로, 중국과 대만간의 관계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한국전쟁은 중국의 대외 관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은 UN으로부터 \'침략자\'라는 낙인이 찍힘으로써 명예가 실추되었고, 다른 나라와의 외교 관계에 있어서 많은 부담을 안게되었다. 그 결과 한국전쟁에 끝난지 20년 지난 1971년에야 UN에서 대표권을 부여받게 된다. 한국전쟁이 자유 진영의 단결을 촉진한 반면, 공산 진영에는 미묘한 갈등을 낳았다. 바로,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그것이다. 중국은 소련이 한국전쟁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은 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또, 소련은 중국의 공산주의를 가볍게 여겼다. 이러한 이유들은 후에 중국과 소련의 분쟁으로 발전하였다.
Ⅶ. 한국전쟁(6 25전쟁)의 결과
전쟁은 3년 1개월간 계속되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 명을 포함한 약 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 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군인 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 7,748명, 미군이 3만 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공군은 약 90만 명, 북한군은 약 54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쟁기간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휴전협정 제60조에 의거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대한민국과 UN 참전 16개국 그리고 북한과 중공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이 개최되었다.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 실시와 그 결과에 따른 민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같은 해 6월 회담은 결렬되었으며,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Ⅷ. 결론
가공할 만한 전쟁피해는 북조선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국가의 민중에 대한 통제력은 점점 강력해 졌다. 그렇지만 그것은 민중들의 자발성에 근거한 것이었다. 남한의 시각에서 국가의 민중에 대한 통제력의 강화는 시대적 역행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자면 북조선의 사회는 민중이 없는 사회처럼 보인다. 그러나 북조선의 입장에서는 단지 국가 속에 민중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국가의 보위가 곧 민중 개인의 생존을 보장하는 길이라는 것을 전쟁기간을 통해 절절히 체험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국가로부터 소외된 남한 민중의 저항이 남한사회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동력이 되어 왔다면, 국가와 결합된 북조선 민중의 자발성이 북조선의 사회체제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남북관계의 진전과 조·미, 조·일관계의 진전은 이러한 괴리의 폭을 좁혀 줄 것이다. 북조선의 공적이 평화적 동반자로 등장하게 되면, 국가에 포섭되어 있던 개인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물론 당분간은 그것이 경제건설에의 동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반미’를 중심으로 한 사회통합력 만큼 그것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이미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생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을 새롭게 해석하기 위한 노력은 민중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민중의 재발견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국가로부터 도피하거나 통합되어 간 남북 민중 개인이 모두 생존을 위한 길을 선택한 것이라는 공통의 논리를 찾을 때 가능할 것이다.
참고문헌
▷ 김태희, 국제전으로서의 한국전쟁과 동서냉전, 국제정치논총 특집, 한국국제정치학회, 1990
▷ 김동춘, 전쟁과 사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돌베개, 2000
▷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上, 下, 일월서각, 1986
▷ 온창일, 휴전을 둘러싼 한미관계 한국전쟁전후 민족격동기의 재조명, 한국전쟁연구회 역, 서울 한국전쟁연구회, 1987
▷ 이철순, 한국전쟁직전북한의 위협에 대한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인식, 역사와 사회 국제분석학회, 2000
▷ 존 R.메릴·신성환 역, 침략인가 해방인가, 과학과 사상
▷ 한국 정치 연구회 정치사분과 편, 한국전쟁의 이해, 역사비평사, 1990
▷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 을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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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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