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홉스봄『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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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에릭 홉스봄『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장 총력전의 시대
2장 세계혁명
3장 경제적 심연 속으로
4장 자유주의의 몰락
5장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본문내용

후 쿠데타 음모를 진지하게 꾸미기 시작한 스페인 장군들은 재정적인 지원과 실천상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그에 대하여 이탈리아와 협상을 벌였다.
스페인 전역에서 발생한 쿠데타는, 합법적이고 정식으로 선출된 공화국 정부와, 공산주의에 대항한 민족주의 십자군을 자임하는 반란 장군들 사이의 장기화된 내전을 발전했다.
스페인 내전은 파시즘이 패배할 좋은 징조로 보이지 않았다. 국제적으로 그 전쟁은 파시스트 국가와 공산주의 국가가 싸운 유럽 전쟁의 축소판이었다. 국내적으로 그 전쟁은 우파의 동원이 좌파의 동원보다 훨씬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난 전재이었다. 그 전쟁은 완저한 패배로 끝났던 것이었다.
IV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내전은, 몇 년 지나지 않아 파시즘을 파괴하게 된 세력의 형태를 예기했고, 준비했다. 그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정치, 즉 국민적인 적을 패배시키기 위해, 동시에 사회를 쇄신하기 위하여 애국적 보수주의자들에서부터 사회 혁명가들까지 포함하는 국민전선이라는 독특한 동맹을 예기했다. 그 결과로 이데올로기적 구별 없이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에 기반한 거국적인 정부가 거의 전 유럽에 등장했다.
공동의 위협이 그들을 단결시키기는 했지만 10월 혁명의 옹호자들과 적대자들 사이의 적대감과 상호 불신이 어느 정도 약화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단결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서 그러한 적대감의 약화는 훨씬 더 촉진되었다. 스페인 정부나 공산주의자들이나 모두 혁명이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수호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는 또 권력에 이르는 봉기적인 길에서 점진주의적인 길로, 대결적인 길에서 협상적인 길로, 심지어는 의회주의적인 길로서 의식적인 전환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쿠데타에 대한 스페인 민중의 명백히 혁명적이었던 반발 덕분에 공산주의자들은 이제, 히틀러의 집권 이후 공산주의 운동이 맞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요청되었던, 본질적으로 방어적인 전술이 어떻게 전진의 전망, 즉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로 이어지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요컨대 반 파시즘 전쟁이 논리는 좌파를 향한 것이었다.
V
거의 10년에 걸쳐 코민테른의 반파쇼 통일 전선이라는 노선이 명백히 실패로 돌아갔지만 1941년에 이르며 코민테른 노선의 논리가 그 진가를 충분히 발휘한다. 왜냐하면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고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임에 따라 전쟁은 군사적인 것만큼이나 정치적인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코민테른 노선은,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소련의 공산주의 사이의 동맹을 요구하는 것이 되었고, 유럽 각국 내에서는 독일이나 이탈리아에 저항할 각오가 된 모든 사람들을 단결시킬 것을, 즉 정치적 스펙트럼 전체에 걸친 레지스탕스 연합을 구성할 것을 촉구했다.
전후의 체제와 정부의 정통성이 기본적으로 그들의 레지스탕스 경력에 근거했으므로, 유럽 레지스탕스 운동의 역사는 대체로 신화적인 성격을 띤다. 그런데 레지스탕스 운동에 관해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좌파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레지스탕스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는 것을 용이하게 한 특성으로 그들의 국제주의와 자신의 목숨을 대의에 바칠 정도로 열렬하고 거의 천년 왕국적인 신념을 들 수 있다.
공산주의자들은, 발칸반도의 게릴라 본거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혁명적 체제를 수립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그러한 일방적인 권력 장악 기도를 저지했다. 소련의 입장은, 국제적으로나 각국 내에서나 전후의 정치가 포괄적인 반파쇼 동맹의 틀 속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소련은 자본주의 체제와 공산주의 체제의 장기적인 공존을 기대했고, 그 이상의 정치적, 사회적 변화는 아마도 전시연합에서 나올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 내에서의 변화에 의하여 이루어 질 것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후 이러한 스탈린의 꿈은, 오히려 스스로 자신의 힘과 폭을 입증해 주었다.
VI
대부분의 아시아, 아프리카, 이슬람 세계에서 유일한 적은 파시즘이 아니라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였고, 제국주의 열강은 압도적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었다. 논리적으로 제국주이 열강의 적은 식민지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잠재적인 동맹군이기도 했다. 일본조차 아시아에서는 비백인 투사로서 반식민주의 세력에 호소할 수 있었다. 따라서 반제국주의 투쟁과 반파쇼 투쟁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었다.
중요한 점은 그러면 왜 반제국주의와 식미지 해방운동이 결국 압도적으로 좌파 쪽으로 기울었고, 그럼으로써 전쟁이 끝났을 때 전 지구적인 반파쇼 동원에 수렴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근본적인 이유는 서방의 좌파가 반제국주의 이론 및 정치의 양성소였고, 식민지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이 압도적으로 국제적 좌파, 특히 코민테른과 소련으로부터 나왔다는 데 있다. 이러한 서방 선진국들의 반파시즘과 그 식민지들의 반제국주의는 전후에 재발하게 될 이해관계의 충돌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가 전후 미래의 사회적 변혁으로 상정한 것을 향하여 수렴되었다.
VII
결국 파시즘은 자신의 중심국들 밖에서는 아무 것도 동원하지 못했다. 파시즘의 호소력은 실패와 패배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세계는 1945년 혼돈 속에서 무너졌고 그들의 이전 신념에 대한 단순한 충성은 그들에게 실제로 역효과를 가져왔다. 다른 한편, 반파시즘은 엄청난 범위의 세력을 단결시키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이러한 단결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었고, 몇몇 점에서 지속되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그 단결은 계몽주의와 혁명의 시대의 공유된 가치와 열망에 기초한 것이었다. 또 대부분의 체제에서 모든 인종과 성(性)의 동등한 권리 획득에 몰두했고, 보다 중요하게는 1945년 이후에 이들 모두가 시장의 지배권을 거부하고 국가에 의한 경제의 적극적인 관리와 계획을 선호했다. 승전국들은 추축국에 대한 승리가 사회변혁의 새 시대를 열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후 세계로 나아갔다.
하지만 단결해 맞설 대상으로서의 파시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자마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의 반파쇼 동맹은 즉각적으로 붕괴하였고 다시 한 번 서로 적으로 대치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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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15
  • 저작시기20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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