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불교, 불교와 기독교] 기독교의 관점에서 본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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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교와 불교, 불교와 기독교] 기독교의 관점에서 본 불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불교의 성립

2. 불교사상의 발전 및 전개

3. 인도불교의 전파

4. 인도불교의 쇠퇴

5. 불교의 여러 유파들

6.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비교
(1) 소승불교
(2) 대승불교

7. 불교의 경전

8. 인도불교의 현재

9. 기독교와 불교의 비교

10. 불교 - 하느님 없는 깨달음

11. 참고자료

본문내용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님'을 지적하면서, 그 법이 입법자인 여호와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그에 더하여, 성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며 "죽은 사람은 벌써 죄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알려준다. 법정에서도 어느 범죄이든지 두 번씩 벌을 닫는 일이 없어야 함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죽음을 통해 이미 죄의 대가를 치른 사람이 단지 과거의 행위에 대해 또다시 벌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재생할 이유가 무엇일까? 더 나아가, 과거의 무슨 행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회개하고 개선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붓다의 가장 탁월한 특성이라는 자비와 일치하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성서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말한 다음, 계속해서 "하느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알려준다. 그렇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타락, 죄, 죽음을 제거하시고 모든 인류에게 자유와 완전성을 가져다주실 것임을 약속한다.-로마 6:7, 새번역, 23; 8:21; 이사야 25:8.
재생에 관하여, 불교 학자인 왈폴라 라훌라 박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존재란 다름아니라 신체적`정신적 힘 혹은 에너지의 복합체다.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체의 전면적 기능 정지 상태다. 신체의 기능 정지와 더불어 이 모든 힘과 에너지가 완전히 끝나는가? 불교에서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계속해서 더 많이 존재하려는 의지, 의욕, 욕망, 갈구는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움직이고 심지어 온 세상을 움직이기까지 하는 엄청난 힘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힘, 가장 큰 에너지다. 불교에 의하면, 이 힘은 신체의 기능 정지 곧 죽음과 더불어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 힘은 계속해서 다른 형태로 나타나며, 재생이라는 과정을 통해 다시 존재하게 된다."
사람은 수태되는 순간 부모 양쪽으로부터 각각 50 퍼센트식 유전자를 물려받는다. 그러므로 전생의 어떤 사람과 100퍼센트 똑같아질 방법은 전혀 없다. 실제로 재생의 과정은 알려진 어떤 과학 원리로도 뒷받침 받지 못한다. 흔히 재새 교리를 믿는 사람들은 그 증거로서 자기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사람, 사건, 장소들을 기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험을 언급한다. 그런 주장이 논리적인가? 지나간 때의 일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시대에 살았던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면, 장래를 예언할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많음-장래에 살았던 것이 틀림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음은 명백하다.
붓다보다 400여 년 앞서, 성서는 생명력에 관해 알려 주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설명하면서,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 신세〕은 그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느니라.〕"(전도 12:7) "영"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루아흐를 번역한 것으로,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력을 뜻한다.(전도 3:18-22) 그렇지만 중요한 차이점은 루아흐가 비인격적인 힘이라는 점이다. 영은 자체의 의지가 있거나 인격을 지녔거나 혹은 죽은 사람의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영은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주신 하느님께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서, 그 사람의 미래 생명의 전망-부활의 희망-이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게 되는 것이다.-요한 5:28,29; 사도 17:31.
10. 불교 - 하느님 없는 깨달음
붓다의 생애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한번은 그와 제자들이 어느 숲에 있었다고 한다. 붓다는 나뭇잎 한줌 집어들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친 것은 내 손에 있는 나뭇잎에 비할 수 있으며,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지 않는 것은 숲에 있는 나뭇잎을 모두 합한 것에 비할 수 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물론 붓다가 가르친 것이 그가 알고 있던 것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이 빠졌다. 고타마 붓다는 하느님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실제로 붓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설사 신이 있다 해도, 신이 나의 일상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다."
"사람을 도울 수 있거나 도우려 하는 신들은 전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참 하느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에서 불교의 역할은 미미한 것이다. 「세계 신앙 백과 사전」(The Encyclopedia of World Faiths)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초기 불교는 하느님에 관한 질문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듯하며, 하느님에 관한 신앙을 가르치거나 요구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각 사람이 스스로 구원을 구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정신이나 의식에 관심을 기울일 것을 강조하는 면에서, 불교는 무신론은 아닐지 몰라도 사실상 불가지론인 셈이다. 힌두교 미신의 속박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화 속의 신들을 버리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불교는 다른 극단으로 흐르고 말았다. 불교는 최고 존재자, 즉 만물이 그의 끗대로 존재하고 활동하게 하시는 분에 관한 근본 개념을 무시하였다.-사도 17:24,25.
이같이 자기 중심적이고 독립적인 사고 방식 때문에, 결과적으로 여러 세기에 걸쳐 많은 유파에서 만들어 낸 전설, 전통, 복잡한 교리, 해석이라는 사실상의 미로에 빠지게 되었다. 복잡한 인생 문제들의 간단한 해결책을 구하려고 의도했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종교적`철학적 체계를 초래하고 말았다. 오히려, 평범한 불교 추종자는 우상과 유골, 신과 악귀들, 영과 조상들을 숭배하며 다른 많은 의식과 관습들을 행하는 일에 몰두하는데, 그런 것은 고타마 붓다가 가르쳤던 것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이다. 하느님 없는 깨달음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것은 효과가 없음이 분명한 것이다.
11. 참고자료
수산, 불교와의 만남, 마하야나
나라 야스아키/ 정호영 옮김, 인도불교, 민족사
구스타프 멘슁, 변선환 역, 불교와 그리스도, 종로서적
히라카와 아키라/ 이호근 옮김, 인도불교의 역사, 민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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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0.24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87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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