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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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배 경
2. 준비 과정
3. 과정 및 경과
4. 영 향
1) 국내 상황의 변화
2) 일본과의 관계 변화
3) 청과의 관계 변화
5. 성 격
* 갑신정변 14개조 정강

Ⅲ. 결 론
1.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
2.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

본문내용

의 議政府에서 매일 회의를 하여 정사를 결정한 후에는 왕에게 품한 다음 政會를 공포해서 정사를 집행할 것. 그리고 14조정부는 6曹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케 할 것 은 내각제도의 수립과 정부조직의 개편을 공포한 것으로 종래의 전제군주제의 지양과 입헌군주제의 초기형태인 입법권과 행정권을 가진 내각제도 창설을 주장,(신용하 1984, 19참조) 입헌군주제의 확립을 추구하고 통치기구의 근대화 등 (14조)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근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조 전국의 地租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을 구하며 겸하여
국가재정을 유족하게 할 것, 6조각 도의 還上制度는 영구히 폐지할 것, 9조 惠商公局을 폐지할 것 그리고 12조 모든 국가 재정은 戶曹로 하여금 관할케 하며 그 밖의 일체의 재무관청은 폐지할 것은 ①제정의 통일 ②조세제도의 개혁으로 민중의 고통을 줄이고자 하였으며 ③환상제도의 폐지 ④ 혜상공국폐지는 보부상의 특권독점상업의 특권의 청산을 공포 한 것(신용하 1984, 20 참조)으로 상인의 자유로운 발전을 촉진시키고자 하였고, 당시 개화당이 회사성립을 장려하고 공업, 철도 등 근대적 산업을 일으킬 것을 주장한 것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적 산업경제를 추구하여 상업을 일으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11조 “4營을 合하여 1營으로 만들고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시급히 설치할 것
군사제도의 개혁을 공포한 것”(신용하 1984, 22)으로 근대적 군대를 건설함으로써 자주무력을 양성하여 국방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7조 奎章閣을 폐지할 것은 전근대적인 양반의 귀족문화제도인 규장각을 폐지함으로써 일반 국민중심인 근대문화를 수립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신용하 1984, 23 참조)
갑신정변의 성격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자주적, 독립적, 근대적’ 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차관도입과 군대 지원을 약속 받았던 상황으로 보아 갑신정변이 외세 의존적인 성격이 보인다는 평가도 있지만 갑신정변을 처음 계획 하는 과정에서부터는 일본의 지원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과 일본이 갑신정변을 지원과정에서 그들의 침략의도를 파악한 김옥균이 거사날짜를 일본 측에 알리지 않았던 점을 들어 당시 거사를 행함에 있어 부족하고, 예방적인 차원의 도움을 받았을 뿐이지 성격자체가 외세 의존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개화당의 혁신정강을 전체적으로 보면 국정전반을 전근대적에서 근대적체제로 개혁하여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하는(신용하 1984, 25 참조) 갑신정변의 진보적인 성향을 볼 수 있다.
Ⅲ. 결 론
1. 갑신정변의 의의와 한계
갑신정변은 “개화파가 조선 사회를 낡은 봉건 체제에서 근대적 자본주의 사회체제로 발전 시키려한 최초의 정치적 시도”(윤대원 1993, 160)였다. 하지만 개화파의 이러한 개혁 구상은 봉건체제를 지양하는 일대 혁신을 꾀하고 있었지만 지주적 입장에서 토지 문제를 해결하려 한 점(윤대원 1993, 161 참조)등 당시 반봉건 투쟁에 가장 철저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던 대다수 일반 민중에게 퍼져 나가지 못한 한계를 보여줬다.
2.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
과거 개화파인 김옥균, 박영효 박영효는 2살 때인 고종 9년(1872)에 영혜옹주의 부마가 됨으로써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그는 1878년에 왕실의 집사가 되었으며, 1881년에는 판의금부사, 1882년 6월에 종친집사가 되었다. 이렇듯 높은 신분과 직책을 가진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개화적 사상을 가지고 반봉건투쟁을 내세운 갑신정변에 참가한 것은 그를 높게 평가할 수 있을것이다.
등과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갑신정변으로 인해 일본의 조선 침략이 가속화 되었다는 점과 그 이후 결국 일본의 식민지가 된 점, 그리고 소수 권력을 가진 자들로 만의 개혁으로서 ‘위로부터의 개혁이다’, ‘부르주아적 개혁운동이다’ 라는 점등을 들어 부정적인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개화당 핵심인사를 제외한 갑신정변 적극 참여자 77명을 추적 의금부에서 심문을 받은 23명의 심문내용이 담긴 ‘추안급국안(推案及鞠案)’ ‘추안급국안’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들이 ‘역모’에 가담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적극 가담했다. 이들의 가담 사유가 많은 경우 입신출세에 있었지만 이를 고발할 경우에도 쉽게 출세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힘든 길을 택했다. 이들 중에는 당시 최고 권신으로 친청파(親淸派)였던 민영익의 겸종도 있었다. 이들은 능력에 의한 인재 발탁과 개화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가담 이유를 진술했다.(박은숙 2005, 185)
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양반 10명(13%), 중인 5명(6%), 상한 39명(51%), 미확인 23명(30%)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미확인 인사들도 특정 신분을 내세우기 어려운 계층이므로 상한일 가능성이 높아 상한의 비중이 3분의 2이상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있으며(박은숙 2005, 185-212 참조), 결국 이는 갑신정변의 14개조 정령 중 내시 가운데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한다는 정령 4조, 전후좌우 4개 영으로 운영되던 친군(親軍·왕실친위군)을 정변 참여자가 가장 많았던 전영 중심으로 일원화한다는 정령 11조 등을 볼 때 이들 상한의 요구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등을 볼 때 갑신정변은 조선 후기 이래 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려던 우리나라 역사발전의 요구를 반영하고 역사 발전의 기본 방향을 실현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참고문헌>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1988.『조선근대사』 서울:논장 P.97
http://www.koreandb.net/dictionaries/Viewframe.aspx?id=4004&ser
박영수. 1998.『운명의 순간들 : 갑신정변에서 대한민국 건국까지』
박은숙. 2005. 『갑신정변 연구』. 서울: 역사비평사.
최영호. 1990. “갑신정변론,” 『한국사 시민강좌』제7집, 65-75.
신용하. 1984. “갑신정변의 역사적 성격,” 『현대사회연구소』,제15('84.9), pp.2-30
김옥균. 1884. 『甲申日錄』. 12월 5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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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24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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