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마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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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마임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한국 마임의 역사
<목 차>
Ⅰ. 마임에 대해서

Ⅱ. 마임과 팬터마임의 시작
1. 마임의 시작
2. 팬터마임의 도입

Ⅲ. 현대마임의 시작
1. 극단 <에저또>의 의미
2. 마임연기자들의 등장
3. 공백기

Ⅳ. 마임의 정착을 위한 노력

Ⅴ. 마임의 확산 및 다양화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마임연기자들
1980년대의 마임연기자들은 저마다의 특징과 개성을 지녔고, 초기마임연기자들의 성과와 좌절, 시행착오 등의 영향으로 훨씬 수월하게 작품활동을 해나갈 수 있었다.
1980년대 중반이후에는 전통적인 마임에서 벗어나 광대마임, 오브제마임, 소리마임 등 다양한 형태의 마임이 시도되었다.
당시의 마임연기자들로는 최규호, 박상숙, 유홍영, 임도완, 심철종 등이 있다.
2) 마임협회의 활동
1989년과 1990년을 기점으로 마임계는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개인적으로 활동하던 마임연기자들은 마임협의 회를 결성하여 후배양성과 마임의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1) 마임협의회의 결성
마임 연기자들은, 개인 작업으로 흩어져 있다보니 상황을 개척하기 힘들고, 타 분야에 비해 집단성이나 힘이 약하다는데 공감하여1990년 11월 최규호, 박상숙, 유홍영, 임도완, 심철종, 유진규 이렇게 6인이 한국마임협의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2) 페스티벌 개최
신영철이 기획, 제작했던 1982년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있었던 '판토마임을 봅시다'는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첫 번째 마임페스티벌이었다.
이후 마임연기자들은 개인적으로 활동하게 되고 1989년에야 다시금 신영철이 그간 활동해 온 마임연기자들을 모아 서로를 정리하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보자는 의도에서 기획, 제작하여 '제 1회 한국마임페스티벌'을 열게 된다.
이후 1990년 예술기획과 공간사랑이 공동기획 제작한 '공간마임의 밤'을 개설하여 매월 마임공연이 관객 앞에 선보였는데, 이로 인해 마임연기자들의 위치가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92년에는 '한국마임 20주년기념공연'이 열려 한국마임의 20년의 결정체임과 동시에 새로운 도약을 알렸다.
(3)세미나 개최
마임워크숍 및 강의와 더불어 마임의 학문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으로 1992년 6월 6일 공간사랑에서 한국마임의 이론적, 역사적 배경을 짖어보는 세미나가 열렸다. 당시 세미나의 내용은 『한국적 마임과 오늘의 한국마임』,『포스트모던마임』,『한국에서 마임이 시작된 배경과 그 발전과정』,『퍼포밍아트로서 창출된 우리마임』이었다.
Ⅴ. 마임의 확산 및 다양화
*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비로소 마임협의회와 마임연기자 개인적 노력이 빛을 발하게 된다. 훈련을 통해 마임연기자 개개인의 능력이 향상되었고, 마임의 저변확대를 위한 노력으로 마임 workshop과 극단이나 학교 등지에서의 마임수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서 마임연기자들이 늘어갔으며 배우나 무용수,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신체의 중요성이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마임협의회의 노력으로 마임축제가 개최되고, 전국연극제등 각 행사에서 마임은 빼놓을 수 없는 공연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작품에 있어서도 본격적으로 타 장르와의 결합이 시도되었고, 소리와 음악을 사용하는 등 다양한 작품들이 선보였으며, 지극히 개인적이었던 마임이 그룹형태로 바뀌어 작품의 스케일 또한 확장되었다.
1) 마임축제와 교육
마임축제는 마임연기자들의 자체적 발전과 더불어 마임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음은 한국의 마임축제들과 더불어 마임교육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마임축제
'춘천국제마임축제'는 1회부터 6회까지는 '한국마임페스티벌'로 불리다가 1995년 7회부터 많은 외국 공연자들의 내한 공연으로 국제적 성격을 갖기 시작하면서 '춘천국제마임축제'로 그 이름을 바꾸어 열리게 되었다. '춘천국제마임축제'는 아시아에서 가장먼저 생긴 마임축제로서 마임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인천에서는 '인천클라운마임축제'가 열렸다.
이후 '한국마임페스티벌'의 서울개최가 논의되어, 순수 국내참가자만의 원 취지대로의 특성을 살린 행사로 부활시키자는 데 합의를 하고 1996년 12월 '한국마임'으로 서울에서 열렸다. 2001년에는 '대구거리마임축제'도 그 막을 열게 된다.
(2)기타 부대행사와 교육
마임페스티벌 뿐만 아니라 마임은 어느새 전국 각지의 연극제나 행사에서 빠질 수 없는 한 분야로 자리 잡았다.
마임 수업하면 벽을 집거나, 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연상하는데, 그 이전에 침묵 속에서 몸을 가지고 하는 연기임을 상기해야 한다.
☞ 1990년대에는 수많은 마임연기자들과 마임극단이 등장했으며,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이제 마임은 질적 성장과 더불어 양적으로도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Ⅵ. 결론
한국마임은 사물이나 동물, 그리고 인물을 모방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전통에 나타난 잡극이나 곡예, 뿐만 아니라 탈춤이나 악극 등에서도 마임적 요소를 찾아볼 수가 있다. 고전에 나타난 무언극으로는 강릉관노가면극과 병신굿 등이 있다.
6.25를 전후로 해서 서양에서 무언극인 팬터마임이 들어오게 되는데 이로 인해 마임이 타 예술과 구분 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팬터마임의 도입에는 연출가 한재수와 세계적인 마임연기자들의 내한 공연의 영향이 컸다.
1970년 이후 극단 <에저또>와 마임만을 전문적으로 하는 마임연기자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현대마임이 시작된다. 당시 마임연기자들은 서양 마임연기자들의 내한 공연과 국내의 실험극의 영향으로 몸짓표현에 관심을 갖고, 표현양식에 있어서 팬터마임과 더불어 한국적이고, 실험적인 형태의 마임을 시도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이후에는 퍼포먼스와 해프닝 등의 영향으로 극적이지 않은 마임과 소리 또는 대사를 사용하는 등의 실험적인 마임이 시도되었다. 이즈음 개인적으로 활동하던 마임연기자들은 마임협의회를 결성하여 개개인의 발전과 더불어 마임의 정착을 위해 힘을 기울이게 된다.
1990년대에는 장르의 혼합, 공간의 확장 등을 활용한 다양한 형태의 마임들이 등장한다. 국내와 더불어 해외 유학파들은 나름대로의 작품스타일을 선보이며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작품들을 창조해냈다.
☞ 지금까지 전통 몸짓에서 팬터마임을 거쳐 현재 다양한 몸짓에 이르기까지 한국마임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한국마임은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앞으로도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한상철, 2008, 현대극의 상황과 한국연극, 현대미학사
한국비평이론학회, 비평2003 봄, 생각의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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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12
  • 저작시기20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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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14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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