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하남위례성][위례성][백제건국][도성]풍납토성과 하남위례성, 백제 건국지로서의 위례성, 두 개의 위례성, 풍납토성을 통한 하남위례성 고찰, 백제 초기 도성의 방위체제, 풍납토성과 위례성의 의의 분석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풍납토성][하남위례성][위례성][백제건국][도성]풍납토성과 하남위례성, 백제 건국지로서의 위례성, 두 개의 위례성, 풍납토성을 통한 하남위례성 고찰, 백제 초기 도성의 방위체제, 풍납토성과 위례성의 의의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풍납토성과 하남위례성

Ⅱ. 백제 건국지로서의 위례성

Ⅲ. 두 개의 위례성

Ⅳ. 풍납토성을 통한 하남위례성 고찰
1. 風納土城內 주요 시설물
1) 육각형 수혈주거지
2) 대형 건물지와 특수 遺構
2. 風納土城의 구조와 축조기법

Ⅴ. 백제 초기 도성의 방위체제

Ⅵ. 풍납토성과 위례성의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 아차산성 → 풍납토성 → 몽촌토성 → 이성산성에 이르고 있다. 왕숙천루트(F코스)는 대모산성(양주쪽)·대전리토성(연천쪽)·반월산성(포천쪽) → 부용산성 → 국사봉보루 → 불암산성 → 옛성산성 → 안산성 → 수석리토성 → 구산토성 → 이성산성에 이르고 있다.
신라에 대한 남방방어체제는 竹嶺·鷄立領방향(G코스)과 화령(H코스), 추풍령방향으로 나누어진다. 죽령과 계립령 방향(G코스)은 忠州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지역이 남한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백제의 수도로 접근하기가 용이한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일 진흥왕이 죽령을 넘어 단양의 적성을 발판으로 한강유역을 차지한 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彈琴臺城·薔薇山城·婆娑城·述川城·芙蓉山城·驛村土城 등이 강변에 배치되어 있어 남한강의 水路를 차단하고 있다. 陸路로는 忠州 → 長湖院 → 利川 → 廣州로 이동하는 길목에 충주의 장미산성, 장호원의 雪城山城, 이천의 雪峰山城, 광주의 남한산성·이성산성 등이 포진되어 있어 길목을 차단해주고 있다. 화령방향(H코스)을 보면 신라는 초기부터 尙州지역을 거점으로 報恩지역을 계속적으로 공격해왔다. 이곳을 점령하면 淸州지역으로 진출이 용이해져 백제의 허리가 잘리는 형상이 되므로, 이것을 막기 위해 백제로서는 이 지역에 수많은 성곽들을 구축하였다. 즉 보은(삼년산성) → 청주(우암산성) → 진천(대모산성) → 안성(망이산성·죽주산성) → 이천(설봉산성) → 광주(남한산성·이성산성) 등의 교통의 요로에 성곽들을 포진시켰던 것이다.
특히 백제는 百家濟海라는 國號가 말해주듯이 예성강 하구로부터 시작하여 강화·인천·안산·남양만·아산만에 걸친 서해안을 바탕으로 황해를 주름잡았던 해양강국으로 그 수도가 한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어 수로를 이용한 교통이 매우 발달되었다. 그러므로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 京畿灣에 대한 해양방어체제는 백제의 수도방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강화도는 봉천산성, 김포는 계양산성, 시흥은 군자산성, 남양만은 당성, 아산만은 자미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해양방어체제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특히 文鶴山城 일대와 南陽灣 장개·사기섬·매바위 등 개죽포 일대와 始興의 君子山城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甕路 시설은 적을 유인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하기 위한 것으로 백제의 해양방어체제의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한성시기 방어체제는 도성을 축으로 원을 그려보면 제일 바깥쪽 원은 북으로 예성강, 남으로는 충주와 청주, 해양쪽은 강화도로부터 아산만의 도서지역이 해당된다. 중간 원은 북으로 임진강, 남으로 장호원과 안성, 서쪽으로 춘천, 해양지역은 김포·인천·군자·남양·평택 등의 해안방어성들이 해당된다. 제일 안쪽의 원은 북으로 의정부·북한산성, 남으로 이천·양평이 해당된다.
백제는 북의 고구려로부터 한강유역의 내륙을 지키고, 예성강 하구로부터 인천·안산·남양만·아산만에 이르는 긴 해안선을 가진 경기만 지역을 지키며 소백산맥과 경계로 한 신라의 공격을 막아야 하기에 사방에 중심성별로 횡과 종으로 많은 성곽들을 축성하는 四位防禦體制를 구축하였다.
한성시기 도성 방어체제는 도성을 중심으로 동·서·남에 위치하는 산성이 角之勢를 이루고 있고, 그 산성들이 핵심이 되어 강변에 분포하는 여러 성들을 건사하고 있는 이른바 위성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강안에 분포하는 성들은 거의 어김없이 隔江相對하고 있었음이 도성방어체제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Ⅵ. 풍납토성과 위례성의 의의
한강 남쪽을 중심으로 성장한 伯濟國은 한강 북쪽의 優休牟國·臣沽國 등을 흡수하며 세력을 키웠다. 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흡수된 집단의 과거 경험을 마치 백제의 역사인양 각색한 대목이 적지 않은데, 이른바 河北慰禮城도 그 중 하나이다. 특히 溫祚王紀는 각색이 가장 심해 文周王 때의 熊津 천도 과정을 온조집단의 남하과정에 빗대기도 하였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기사 중 왜곡된 부분을 제거하면, 백제는 한강 남쪽의 위례성에서 건국하였고, 漢城에서 일단 망한 것이 된다.
위례성은 王城 혹은 大城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적어도 語源上으로는 대성을 뜻하는 한성과 통하는 것이다. 위례성과 한성이 같은 곳일 개연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그런데 위례성은 單城인 반면, 한성은 北城과 南城으로 이루어진 複城이다. 한성이란 위례성에다 또 하나의 성을 합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형태의 도성인 한성이 출현한 시기는 近肖古王 때이다. 근초고왕 26년(371)에 漢山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한산 아래에 새로운 성을 짓고 그곳으로 移居하였다는 뜻으로서, 명실공히 都城制의 정비를 의미한다. 남·북성으로 구성된 한성 건설은 장차 설계될 羅城 축조를 예고하는 일이며, 정치적으로는 이제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왕성 내지 도성을 대대적으로 손질하는 일은 어느 시대이건 왕권 강화의 지표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한강 남쪽의 위례성이란 지금의 風納土城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漢城을 이룬 또 하나의 성은 夢村土城이다. 그러니까 한성 단계에서는 풍납토성이 北城, 몽촌토성이 南城이었던 것이다. 북성 안에는 궁궐과 관청·시장·주택 등 많은 시설이 건설되었다. 남성에도 궁궐과 관청, 그리고 군사시설이 만들어졌다. 양쪽의 궁궐은 각각 正宮과 別宮으로 구분되었는데, 4세기 말엽에는 왕이 정궁, 태자가 별궁에 거주하는 형태였던 듯하다. 남성의 북쪽, 그러니까 북성의 동쪽 성벽 바깥에는 성내동의 구릉지역을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었고, 농경지도 꽤 넓게 펼쳐졌을 것이다. 다만 중국이나 고구려·신라의 도성에 적용된 條坊制의 흔적은 아직 찾아보기 어렵다.
참고문헌
○ 김태식,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영사, 2001
○ 국립문화제 연구소, 풍납토성 잃어버린 왕도를 찾아서, 서울역사발물관, 2002
○ 신상훈, 위례성에서 서울까지-서울의 역사, 계명사, 1994
○ 이형구, 풍납토성(백제왕성), 송파문화원, 2003
○ 이기동, 백제사 연구, 일조각, 1996
○ 한종섭, 위례성백제사, 집문당, 1994
○ 한국생활사박물관 4권 백제생활관과 삼국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키워드

  • 가격5,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9.04.12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2959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