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기행문]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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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답사코스

Ⅱ. 들어가며

Ⅲ. 왕성의 자리로 대세였던 몽촌토성
1. 몽촌토성
가. 위치와 규모
나. ‘몽촌’이라는 이름의 유래
다. 백제의 역사와 같이하는 몽촌토성
라. 토성의 목조방식
마. 발굴된 유물
바. 성내부 시설물
1) 수혈주거지 2) 온돌건물지 3) 저장공
4) 해 자 5) 목 책
사. 현황 및 전망

Ⅳ. 몽촌토성이 왕성으로 위치하기에 불합리한 점

Ⅴ. 미궁에 빠진 왕성의 위치와 떠오르는 풍납토성
1. 풍납토성의 위치와 규모
2. 풍납토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
3. 백제 사람들의 우수한 토목기술을 보여주는 성벽
4. 수준 높은 문화를 보여주는 유물
5. 백제시대 가장 빠른 유적
6. 왕성이 위치하기에 불합리한 점
7. 풍납토성의 현황과 전망

Ⅶ.참고문헌

본문내용

건국되어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시기와 같다. 또한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적들은 주변에 잇는 몽촌토성이나 석촌동 고분구에서 출토되는 유물들보다 수준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주거지의 규모가 상당히 크고 출토 유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도성으로서 손색이 없으며 위상이 높았던 지역임을 암시하는 유물이 다량 출토된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권위 있는 건물의 지붕에만 올렸던 기와가 출토되기도 했으며, 바닥에 깔았던 벽돌, 기둥을 세우는데 쓰인 특이한 10각의 초석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고구려 토기들도 출토되어 한성이 함락된 뒤 고구려 군사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특히 일부 시설물은 화재로 인해 갑작스럽게 무너지거나 폐기된 것으로 확인되어, 한성기기인 개로왕때 고구려 장수왕의 대규모 화공작전으로 왕성이 함락된 긴박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발굴과 연구결과에 의하면 풍납토성은 기원 전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토성으로 백제 한성시지 유적 가운데 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과학성과 객관성을 기하기 위해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으로 출토 유물들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대체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즉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3세기에 만들어진 유물들이며, 이때 이성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유물이다. 이러한 연대는 백제가 기원전 18년 건국되어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시기와 같다.
또한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주변에 있는 몽촌토성이나 석촌동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유물들보다 수준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주거지의 규모가 크고 출토 유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도성으로서 손색이 없으며 위상이 높았던 지역임을 암시하는 유물이 다량 출토된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권위 있는 건물의 지붕에만 올렸던 기와가 출토되기도 했으며, 바닥에 깔았던 벽돌, 기둥을 세우는데 쓰인 특이한 10각의 초석 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고구려 토기들도 출토되어 한성이 함락된 뒤 고구려 군사들이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특히 일부 시설물은 화재로 인해 갑작스럽게 무너지거나 폐기된 것으로 확인되어, 한성시기인 개로왕(455~475)때 고구려 장수왕의 대규모 화공작전으로 왕성이 함락된 긴박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한다.
풍납토성을 3세기에서 5세기까지 한성시기에 주로 사용되다가 고구려의 침략으로 백제가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면서 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뒤 오랜 기간 폐허로 방치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다가 근대에 서울이 급속도로 확장되면서 개발붐을 타고 풍납토성도 파괴라는 전철을 밟아 오랫동안 땅속에 묻히게 되었다. 어쨌든 현재까지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풍납토성이 몽촌토성을 누르고 백제 초기의 왕성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6. 왕성이 위치하기에는 불합리한 점
하지만 풍납토성에도 왕성이나 왕궁이 있었던 자리로 확증할 만한 유적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왕성이 있었다면 왕궁이 지나치게 강가에 인접해 있어 수리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고대시대의 한강의 범람이 잦아 물에 잠겼을 가능서이 높다. 겨울에는 한강이 얼었을 때 북쪽 고구려의 침략을 쉽게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또 왕성은 군사적으로 중요한데 풍납토성은 한강 건너편에 있는 아차산성에서 한눈에 들어와 성안에서의 활동이 모두 노출된다. 이러한 점은 백제가 굳이 이곳에 왕성을 두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던져 주며, 풍납토성과 왕성을 연관시키기 어렵게 한다.
앞으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백제 한성시기의 역사 나아가 우리 역사를 밝혀 줄 결정적인 자료들이 확인될 것이다. 지금 풍납토성 안에는 아파트를 비롯하여 많은 고층건물이 들어서 있고, 단독주택이나 낮은 상가 건물들도 밀집되어 잇다. 아파트 같은 고층건물을 지을때는 기초공사를 땅속 깊은 곳까지 하기 때문에 현재 상태에서 백제와 관련된 문화층이 남아 있거나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낮은 건물들 아래에는 백제 문화층이 파괴되지 않고 그대로 묻혀 있을 가능성도 있다. 아마도 땅속에는 백제 때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과 자취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무언가를 말해 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7. 현황과 전망
풍납토성은 지금까지 알려진 한성백제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시기가 빠르며, 주거지 규모와 출토유물의 위상 등에서 주변의 다른 백제유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특히 현대연합주택지와 경당지구의 육각형 주거지와 대형 건물지, 그리고 토성 동벽의 절단 발굴을 통한 유구 확인 결과 풍납토성이 그 동안 논란되어왔던 백제 초기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일 가능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풍납토성의 계속되는 발굴성과는 백제 초기의 역사를 더 많이 밝혀 줄 것이다. 문헌중심의 고대사를 비롯하여 고고학적 발굴 증거와 신화학민속학인류학 등 관련 학문간의 공동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향후 풍납토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몽촌토성, 석촌동고분군, 한성백제시대 불교 전래를 입증하는 절터, 하남시 춘공동 일재의 수많은 문화재, 한강와 임진강 유역에 연결된 관방시설 등을 연계하여 고대국가로서의 백제의 성립과 발전을 비롯한 백제 도성구조와 생활상들에 관한 보다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현재의 유적 보존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발굴 후 기록만 남기고 복토하거나, 그 위에 고층건물을 짓는다면, 2000년 전통을 자랑하는 서울역사의 유구함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지 못할 것이다. 반면 유적을 잘 보존하여 교육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면 우리역사의 유구성을 바탕으로 민족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을 것이며, 앞선 인류문화의 한 유형을 이끌어온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릴 수 있을 것이다.
Ⅶ. 참고문헌
- 단행본
1. 서울의 성곽,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04
2. 정말 거기에 백제가 있었을까, 고래실, 2004
3.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김태식, 김영사, 2001
4. 풍납토성 잃어버린 왕도를 찾아서, 국립문화제 연구소, 서울역사발물관, 2002
5. 백제의 도성, 이형구, 주류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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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12.23
  • 저작시기20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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