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현전과 홍문관의 도서관적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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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1.왕조의 건국
1.1 태조~성종
1.2 정치제체
1.3 신진 사대부의 성장
1.4 사회구조
1.5 성리학적 명분론
1.6 조선사회의 문학과 예술

2. 집현전의 유래
2.1 세종조의 집현전
2.2 집현전의 인재
2.3 집현전의 변천사
2.4 집현전의 활동
. 2.5 집현전에 대한 현대적 의의와 평가
2.6 집현전 장서 이용

3.홍문관의 성립경위
3.1홍문관의 기능

Ⅲ. 결 론

본문내용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세조 5년 3월에 세조는 신하들에게 하문하기를,
文風을 振作하고 인재를 많이 얻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經史를 親講하거나 詩文을 짓게 하여 士習을 관려하는 것이 어떻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문풍의 진작과 인재의 양성은 세조에게도 지대한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 세조 5년 6월에는 문신 10명을 선발하여 閑官(한관)으로 임명하고 학문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고 성균관과 사부학당 유생 가운데 講經.製述(제술)에 우수한 자에게는 會試(회시)에 할 수 있는 자격을 주게 하였다. 이와 같은 세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師儒(사유)와 유생의 교육과 학문에 대한 열의는 옛과 같지 못하였다. 뛰어난 인재를 얻기 위하여는 새로운 방책이 요청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세조에 의하여 채택된 것이 예문관에 兼官을 두는 제도였다.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하고, 年少總敏(년소총민)한 자를 擢用(탁용)하였고, 集賢殿官이 職事에 얽매여 학문에 전념할 수 없음을 아깝게 여겨 사가독서의 제도를 마련한 바 있는데, 세조가 兼藝文館職을 설치한 것은 그것과 의도가 같다. 즉 문신들이 직무에 얽매여 학문에 전념하는 자가 적으므로 삼품이하 문신 가운데 연소총민한 자 15명을 뽑아 예문관직을 겸하게 하여 이들로 하여금 예문관에서 학문을 연구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문관이 학문의 진흥과 인재양성에 있어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그 대책으로서 사가독서의 제도가 마련되게 되었다.
세종대에 사가독서의 제도를 두어 배출된 인재들이 지금의 대신.학자들인데 이들은 거의 늙었고, 인재를 양성함이 없으면 장차 더불어 정치할 신하가 없게될 것이므로, 세종대의 집현전을 본받아, 연소한 문신을 뽑아 한직을 수여하여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 건의는 곧 허락되어, 연소한 문신을 택하여 전념독서할 수 있도록 그 節目을 논의하여 청하라는 전교가 내렸고 사가독서문신관장사목이 정하여졌다. 이리하여 세종대에 실시되었다가 집현전의 혁파와 함께 없어진 사가독서의 제도가 성종 7년에 다시 실시되었고 이 제도는 홍문관이 성립된 후에 독서당으로 오래 계속되었다.
세조조에는 예문관에 겸예문관직을 둠으로써, 성종조에는 예문관과 사가독서의 제도를 통하여 국가적인 과제인 인제양성, 학문의 진흥에 대비하였던 것이다.
3.1홍문관의 기능
홍문관은 집현전의 기능을 계승하여 그 후신적 성격을 가지며, 왕의 자문에 응하는 관청으로 궁내의 경적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여 국와의 고문기관으로서 치정의 득실과 간쟁을 논박하고 경연과 춘추관의 모체로서 그 관직을 겸임하는 당대의 명유와 석학들로 구성되었다.(최승희 1970,97-111) 원래 군주의 교육기관인 경연을 중심으로 군주의 연학과 수양에 대비하여 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며, 문서를 처리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왕명으로 나가는 많은 교서 내지 교지를 여기에서 작성하였다. 그리고 홍문관의 모든 관원은 경연관을 겸하게 되어 왕의 경서나 사적 및 정사에 관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게 됨으로써 그 시책과 정책 구상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이렇게 홍문관에서 왕의 논지 작성의 기능이 있었기에 왕과는 아주 가까웠으며, 부수찬이상의 직위에는 문과 급제자 중에서도 우수한 인재를 임명하였기 때문에 소위 “옥당”이 라고 불렸다.
홍문관의 법제적인 기능은 성립 때에는 궁중의 경서.서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는 것이었는데 한말까지 계승되었다. 실제기능은 위의 법제적인 업무는 물론, 국와의 호학, 정치분위기 등과 관련되어 성종 이후에는 감찰.언론 기능도 행사했다. 그리하여 홍문관은 1489년 이후에는 장내부경적. 치문한. 비고문의 기능과 감찰기능,언론기능을 행사하는 장서.문한.시종.감찰.언론 기관으로 확대강화 되었다.
Ⅲ. 결 론
태조~태종대를 조선의 창업기라고 한다면 세종대이후는 수성기하고 할 수 있다. 수성기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는 사회의 통합과 민생의 안정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안정된 국가 경영을 위한 새로운 통치 철학을 정립하고, 그 통치철학을 실제 정치에 구현할 수 있는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잘 뒷받침해주는 것이 바로 집현전과 홍문관의 역할이였다. 집현전과 홍문관을 통해서 학문연구와 실천을 중시하여 통치의 목표를 학문을 통해서 터득한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려는데 두었다. 경연제도를 통해서 집현전관과 홍문관관들의 참여에 의한 정책결정과정과, 정책집행후의 결과를 예측해보는 의사소통과정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여 그것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국가가 정치적.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시기에는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유명한 도서관들이 존재했음을 도서관사는 말해주고 있다. 세종조의 집현전을 비롯하여 성종기의 홍문관은 국가제도를 정비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이는 집현전의 장서각, 홍문관의 등영각인 서고들의 전적들이 그 사실을 증명해준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이러한 도서관들에 수장되었던 전적을 근거로 시사와 경연을 통하여 국시가 세워졌으며, 그에 따라 제도가 정비되고 문화가 계발되었다. 즉, 전적은 정책을 결정하는데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21세기형 집현전”을 꿈꾸는 이유다. 많은 영역이 세분화되고 전문화되고 있는 현대에 집현전과 홍문관처럼 각 분야의 전문화된 지식을 모아주고 상호의견을 나누며, 정책을 수렴해가는 기구는 더욱더 필요해졌다 하겠다.
<참고문헌>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6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웅진지식하우스, 2008
-이한우,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해냄, 2006
-최원기, 테마로 읽는 조선의 역사, 느티나무, 1997
-양계봉, 집현전 장서 이용에 관한 연구, 어문학연구 1997
-이재철, 집현전고, 한국도서관협회 단행본
-손보기, 세종대왕과 집현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단행본
-김남이, 집현전 학사의 삶과 문학세계,태학사 2004
-최승희, 조선초기 언관.언론연구, 서울:서울대학교 단행본,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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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17
  • 저작시기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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