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영국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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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영국의 모습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만큼 하층으로부터의 사회적 위험도 긴박하지 않았다. 거대한 상비군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의 과세수준도 두드러지게 낮았다.
그리하여 농촌은 사회적 평화가 비교적 유지되었다. 더욱이 농민들은 다른 곳보다 훨씬더 가벼운 세금을 물고 있었을 뿐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훨씬 더 분화되어 있었다. 농촌 지역에 상업적인 자극이 집적됨으로써, 이러한 계층분화가 이번에는 귀족과 젠트리들로 하여금 토지의 임대를 위해서 직영지 경작을 사실상 포기할 수 있도록 하였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유리하게끔 만들었다. 그 결과로, 비교적 부유한 농민층 즉 요맨 계층과 농촌의 수많은 임금노동자 계층이 일반 농민대중과 함께 공고한 계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촌락에서의 상황은 귀족에게는 꽤나 안정된 것이었고, 따라서 더 이상 농촌의 반란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던 이들 귀족은 국가가 마음대로 휘두를 중앙의 강력한 무력기구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동시에, 이처럼 농촌이 잠잠해질 수 있도록 하는데 이바지하였던 낮은 과세수준은, 재정체계를 떠맡기 위해서 세워질 거대한 관료제의 등장을 가로막았다. 중세이후로 귀족들이 지방의 행정기능을 떠맡아왔기 때문에, 왕정은 전문적인 지방적 기구를 결코 갖추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스튜어트 왕조가 발전된 절대주의로 나아가려고 한 노력은 처음부터 대단히 불리한 형편에 놓여있었다.
1625년에 찰스 1세는, 훨씬더 발전된 절대주의의 구축을 꾀하였다. 전시기의 분위기와 더불어 수많은 젠트리들의 비위가 상하게 되었다. 변덕스런 외교정책도 치세 초부터 국왕의 힘을 약화시켰다. 아무런 의미없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전쟁의 수행과 그것에 책임이 있는 대신을 신랄하게 비난하였던 의회는 무기한으로 해산 당해버렸다.
뒤이은 ‘개인통치’시기에 국왕은, 작위 귀족에게 특권들을 줌으로써 귀족 계급 안에서 태생과 서열의 공식적인 계서제를 되살리는 방식으로 고위 귀족들을 더욱 가까이 끌어들이려하였다. 도시들에서는 전통적인 도시귀족을 이루고 있었던 도시상인의 최상층에게 독점권과 각종 은전들을 베풀었다. 젠트리의 대부분과 새로 등장한 상업세력은 국왕과의 제휴로부터 배제되었고, 찰스 1세 아래에서의 교회와 주교제로 재조직되어 나타났다. 이것은 지방의 성직자와 지주들 사이의 종교적 거리를 벌여놓은 희생을 치르면서 성직자의 규율과 기강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스튜어트 절대주의의 성과들은 국가의 이데올로기 및 종교적 기구로 주로 국한되어있었다. 그 기구는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 아래에서 왕권신수설과 교회의 예배의식을 주입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경제적, 관료적 기구는 재정적으로 모진 속박에 얽매여 있었다. 의회는 고유의 과세권을 움켜쥐고 있었고, 이를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식으로 하였으나 영국에서 통하지 않았다. 튜더 왕조가 왕령지 매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찰스 1세는 의회의 통제를 벗어나서 확대된 국가 기구를 지탱할 수 있는 조세수입을 확보하기 위해서, 봉건적이거나 신봉건적이거나 간에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였다. 즉, 후견권을 부활하고 기사서임에 대한 부과금을 징수하며 국왕의 강제매입권 강제매입권(purveyance): 조달관이 통상적인 가격이하로 물품을 사들일 수 있는 국왕의 권리
을 사용하고, 독점권의 수를 증대시키며 작위를 마구잡이로 수여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에 관직판매가 처음으로 국왕의 주된 수입원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와 동시에 관직 보유자에 대한 보수가 국가 지출에서 커다란 몫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단들의 남용은 토지소유 계급들의 반발만 불러일으켰고, 이들 가운데 많은 자들은 새로운 궁정과 교회 모두에 대해서 청교도적인 반감에 젖어들게 되었다.
찰스가 마지막으로 생각한 것은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거두어 오던 유일한 방위세를 확대시키려는 것이엇다. 그 세금은 해군의 유지를 위해서 항구도시들이 부담해온 선박세였으나, 치안판사들이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그 시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영국의 절대주의가 갖추지 못한 요소들을 묵묵히 드러내보엿다. 대륙의 절대주의는 그것이 가지고 있던 군재를 기반으로 하여 세우졌다. 하지만 영국은 그것이 상비군을 기를 필요가 없는 한, 빈약한 수입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오로지 의회만이 상비군의 비용을 대줄 수 있었고 그래서 그것이 일단 소집된다면 머지않아 틀림없이 스튜어트 왕조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은 역사적 이유 때무에, 영국에서는 끓어오르고 있던 왕정에 대한 정치적 반란은 왕정에 맞서 무장반란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수단들을 전혀 가질수 없었다. 반대파 젠트리는 의회가 소집되지 않는 한, 국왕의 개인 통치체제를 헌정적으로 공격할 구심점조차 갖추지 못하였다.
이런 팽팽한 상황은 스코틀랜드에서 깨어졌다. 1638년에 몰수되었던 교회재산을 찾으려고 스코틀랜드 귀족에게 제재를 가한 적 있는 찰스 1세의 교권주의는 영국 국교회와 같은 의식을 그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종교적인 반란을 불러일으켰다. 군사력을 갖춘 스코틀랜드에게 영국 왕정은 그에 비할만한 군사력을 끌어모을 수 없었다. 1640년에 스코틀랜드의 침략으로 찰스의 개인통치체제가 마침내 끝장나 버리게 된 것은 영국절대주의가 무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국왕이 스코틀랜드 인들에게 당한 군사적 패배문제를 처리하려고 마지막에 가서 소집하였던 의회는, 보다 오래된 헌정체제로 돌아갈 것을 선언하면서, 스튜어트 왕정이 이룩한 모든 업적들을 죄다 없애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년 뒤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가톨릭 교도들이 반란으로 진압을 위한 의회와 국왕은 서로를 내전으로 몰아넣었다. 영국 절대주의는 그 주변부에서의 귀족적 분리주의와 씨족적 집착 때문에 위기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 구 요소는 역사적으로 영국 절대주의의 이면에 남아있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상업화된 젠트리와 자본주의적인 도시 그리고 일반 수공업자층과 요맨층에 의해서 영국 절대주의는 그 중심에서부터 무너지게 되었다. 이들이 절대주의를 넘어뜨리게 하고 부르주아 혁명을 일으켜 영국 절대주의의 막을 내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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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9.10.16
  • 저작시기2009.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7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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