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피해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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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전쟁과 피해에 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한국전쟁

●배경

●한국전쟁 전 전투

●원인

●전쟁준비

●경과

●피해

본문내용

세를 갖추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북쪽 땅인 원산 등 기타 지역에 폭격을 가했다. 1월 12일 일본군의 참전설이 나오자 이승만은 이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였다. 2월 이승만은 38선은 공산군의 남침으로 이미 없어진 것이므로 북진 정지는 부당하다고 선언하였으며 2월 15일 한반도 통일을 전쟁 목표로 분명히 밝히고 미국에도 통보하였다. 인민군은 10여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퇴각하였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서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3월 24일 이승만은 한만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다시 북진했으나 대대적인 공격이 없는 참호를 중심으로 한 진지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7. 휴전협정
유엔군과 한국군이 반격하였고 인민군을 압록강까지 북쪽으로 물리쳤을 때(나중에 중국군의 반격으로 현재의 휴전선 부근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승만은 한국을 분단시킬 여러 번의 정전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절하였고 이 때문에 연합국들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다. 이승만은 국제연합의 도움으로 통일된 한국의 지도자가 되기를 희망하였기에, 북한 정부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방해가 되는 어떤 평화 협정에도 반대하였다. 또한 그는 중국에 대응하여 좀 더 강력한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이 폭격을 하는데 망설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곤 하였다. 이승만은 1951년 6월 9일 38선 정전의 결사반대를 선언하였고 6월 27일 소련의 정전안을 거부하였다. 1951년 7월에 정전 회담이 개시된 후 세계 전쟁 사상 처음 보는 제한 전쟁(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이 벌어졌다. 1951년 9월 20일 이승만은 휴전수락의 전제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유엔감시 하 총선거를 요청하였다. 군사분계선 문제는 이미 1952년 1월 27일에 타결되었으며, 1952년 5월에 이르러선 포로교환 문제를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의제에 합의하였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으로 정전 회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어(그 배경은 스탈린 참조), 1953년 3월 19일 소련 내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 마감한다는 결정을 중국과 북한에 통보하면서 부상포로의 우선 교환에 동의하도록 지시(또는 요청)했다.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친서에서 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요구하였다.
주로 개성과 금강산에 이르는 곳에서 전투가 계속되다가 북한(조선인민공화국)이 소련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고 유엔군 측의 승인으로 휴전이 되었다. 1953년 7월 27일에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 휴전으로 매듭을 지어졌고, 현재까지 그 효력이 이어지고 있다.
2007년 남북 정상 회담으로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기로 하였다.
8. 휴전협정 이후 충돌
휴전협정 이후 크고 작은 국지도발 및 무력충돌이 여러 번 있었다. 1968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신조를 앞세워 청와대 침투를 시도한 사건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경찰과 민간인을 포함해 인명피해가 있었다. 1990년 이후에는 서해 NLL부근에서 수차례의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1999년에는 서해 연평도 부근에서 제1연평해전이 있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사이에 비슷한 지점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였다. 2008년에는 금강산에서 대한민국의 관광객 1명이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제일 최근의 사건은 2009년 발발한 대청해전이다
●피해
3년 1개월에 걸친 동족상잔의 한국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폐허화했고, 참전한 외국의 병력에까지 극심한 해를 입었으며 이때 사용된 폭탄의 수는 불분명 하지만 1차 세계대전에 맞먹는다고도 하고 그렇지 못하다고도 한다. 한국전쟁은 그 밖에도 약 20만 명의 전쟁미망인과 10만 명이 넘는 전쟁고아를 만들었으며 1천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그리고 45%에 이르는 공업 시설이 파괴되어 경제적, 사회적 암흑기를 초래했다
1. 대한민국
미국의 통계에 따르면 60만 명이 전쟁 중에 사망하였고, 전체 참전국의 사망자를 모두 합하면 2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의 사망자는 백만 명이 넘으며 그중 85%는 민간인이다. 또한 미군에 의해 피난민들이 학살당한 노근리 학살사건, 거창주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몰려 학살당한 한국군의 대표적인 전쟁 범죄인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대중선동으로 인민군들이 우파들을 죽인 소위, 인민재판 등의 전시 민간인 학살피해자 즉, 전쟁 범죄 피해자들도 발생했다. 이러한 민간인 피해 및 전쟁범죄 사건의 규모는 극히 최근에 공개된 것이다. 소련의 통계에 따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11.1%의 인구가 전쟁을 통하여 사망하였는데 이것은 113만 명에 이른다. 양측을 합하여 250만 명이 사망하였다. 80%의 산업시설과 공공시설과 교통시설이 파괴되었고, 정부 건물의 4분의 3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으며 가옥의 절반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 미군은 약 54,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으며, 이는 베트남 전쟁 때보다는 약간 적은 수이지만 훨씬 짧은 시기를 고려한다면 많은 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승만이 예상했던 대로 위기의 이승만 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전쟁을 통해, 아직 꼴을 갖추지 못했던 국가는 이제 미군의 주둔과 미국의 경제지원으로 군사적·경제적 토대를 구축할 수 있었고, 전쟁 이전부터 이승만정권의 이념이었던 반공주의가 더욱 극심해져, 한국의 우경화는 더욱 심해졌다.
2.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전쟁 과정에서 그리고 전쟁 이후에 김일성은 자신의 정적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게 됨으로써 '김일성 유일체제'의 기반을 닦았다. 그리고 공산주의적인 공업화 즉, 통제경제에 따른 공업화를 더욱 급속하게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으나, 급진적인 단기정책들의 효과는 미비하여 60년대가 지난이후 대한민국(남한)과의 비교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악화되었다.
북한은 전후 복구를 위하여 소련으로부터 10억 루블을, 중국으로부터 8억 위안을 지원받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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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1.27
  • 저작시기2009.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3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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