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자원에대한 경제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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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르헨티나의 자원에대한 경제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아르헨티나 국가개요

2. 아르헨티나의 경제
⑴ 경제위기
⑵ 경제성장-활력을 보이는 수출입
⑶ 무역흑자
⑷ 다분야 투자 잠재력 보유

3.에너지 현황
⑴ 석유자원개발
⑵ 천연가스개발
⑶ 광업개발
⑷ 신재생 에너지 개발

4.결론

5.참조

본문내용

정쩡하게 난립하게 된 금융기관과 금융감독의 소홀이 기업의 채산성 악화와 결합하는 전형적인 공황상태가 발생한 것이다.
2. 1980년~1981년 아르헨티나 금융공황
1980년 초, 디플레이션의 심화에 더하여 제 2 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수많은 민간기업들이 파산직전으로 몰리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다.
전술한 대로 대형 금융기관의 탄생을 통해 민간에 충분한 유동성을 공급할 책임이 있는 금융기관들이 낮은 진입장벽으로 인해 소형 금융기관의 형태로 난립하게 되자, 당장 기업들로 부터 채무 만기요청에 응하지 못하게 되고 서둘러 채권회수에 들어가게 되자, 순식간에 몇개의 회사들이 도산하면서 동시에 소형 금융기관 몇 곳이 파산하는 사태에 이른다.
이것이 연쇄효과를 불러오며 Credit Line이 일시에 국영은행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아르헨티나의 금융 중개기능이 마비되고 또한 기업들에 대한 채무 만기가 차단되는 등, 아르헨티나 전역은 1980년과 1981년 사이에 발생한 민간기업의 연쇄부도 사태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된다.
군사정부는 이때 자신들의 지지기반 와해를 두려워하여 국영은행을 통해 소수 독점체에 집중되었던 여신이 일시에 부실채권화 되는 최악의 상태를 막기 위해 파산직전인 소수 독과점 기업들에 대하여 막대한 구제금융을 실시하기에 이른다.
이 당시에 실시한 막대한 구제금융은 1981년부터 바로 정부의 채무로 전환되게 이르는데 이것이 GDP의 40%에 이르는 아르헨티나의 고질적인 재정적자의 시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수습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민간기업 및 금융기관의 파산을 막기 위해 국영은행의 구제금융이 즉각, 정부의 채무로 전환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정부의 채무를 보전하기 위한 국채발행이 급선무였지만, 국채를 발행하더라도 국채를 살 수 있는 민간자본 및 민간 금융기관이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국채보다는 통화증발에 의한 정부 적자재정 편성이 일차적으로 행해지는 최악의 상황이 이루어졌으며 이 때문에 아르헨티나는 만성적인 인플레이션과 초(超)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이 통제를 벗어난 상태로 수백%의 인플레이션율. 재화와 서비스의 희소서이 증가하여 가격은 계속 상승하고 정부는 이를 통제하지 못해 또 다시 화폐를 발행)의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1981년 악명높은 비델라 대통령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레오폴도 폴트나또 깔띠에리(Leopoldo Fortunato Galtieri 1981~1982)가 대통령에 오른다. 1978년을 기점으로 좌익 게릴라의 전쟁을 종식한 군부정권은 이어 자신의 존립을 위해 1980~1981년에는 칠레와 국경분쟁을 일으키고 이어 1982년에는 석유자원 확보라는 명목을 위해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에 기습상륙 이른바, 포클랜드 전쟁을 일으킨다.
당시 GNP 600억 달러에 지나지 않던 아르헨티나가 게다가, 대금융공황으로 엉망이 된 경제와 재정상황에서 군부정권은 통화증발을 통해 전비를 충당했고 결국 76일간의 전투끝에 아르헨티나의 탔?모든 해군 및 공군 군사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영국에게 패배하자 군사정권은 경제정책의 실패, 민간인 학살에 전쟁패배라는 국가에 치명적인 상처만을 안겨준채 물러나게 된다.
3. 그 후...
통화증발에 의한 대 구제금융과 전쟁수행은 아르헨티나 경제를 파산지경으로 몰고간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하이퍼 인플레이션은 그 후유증이다. 사실상 종이조각으로 변한 아르헨티나 페소화는 한때 1달러당 0.042 페소(1989년)로까지 추락하였다.
통화증발에 의한 구제금융으로 인해 발생한 엄청난 재정적자를 메우기 위해 아르헨티나 정부는 결국 국채를 발행할 수 밖에 없었지만, 이미 아르헨티나 금융과 경제의 약체화가 폭로된 상태에서 국채발행은 완전한 자살극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 국채는 한 때 67%의 할인율이라는 엄청난 금리부담을 안으며 발행될 정도였다. 이것이 다시 재정적자를 늘리는 암적 요소가 된 것이다.
알폰신 정부는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 확립을 위해 수번에 걸친 쿠데타를 진압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지원을 요청한다. 이미, 전임 비델라 정권에서부터 누적되기 시작한 외채는 알폰신 정부에 이르러서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외채가 달러화 표시 국채의 상환에 쓰이는 등 기본적인 금융건전화를 위한 그 어떤 조치에도 사용될 수 없는 치명적인 상황이었다.
결국 2001년 12월 전 아돌포 로드리게스 사아 대통령은 '지불을 유예하겠다(will suspend all payment)'며 모라토리엄(채무상환유예)을 선언했었고 2002년 1월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된 에두아르도 두알데는 디폴트(채무상환불이행)를 선언했다.
디폴트선언 이후 아르헨티나는 계속해서 IMF에 지원요청을 하면서 예금동결과 임금삭감, 이중환율제도 전면 폐지 등 IMF 요구를 대부분 수용했다. 하지만 IMF는 공공부문 개혁 없이는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을 표명하면서 지원요청을 거절했다. 결국 아르헨티나 정부는 1년여에 걸친 IMF와 힘겨운 협상끝에 일부 외채의 재조정과 긴급차관 제공에 합의했다.
2003년에는 만기도래한 31억달러의 국제통화기금(IMF)의 차관을 상환하지 못해 다시한번 국가부도 위기를 겪었으며, IMF와 또다시 3년간 채무상환을 유예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금융구제안에 합의해 위기를 넘겼다.
2005년 12월 22일 아르헨티나 하원은 ‘국제통화기금(IMF) 채무를 전액 상환하는 특별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아르헨티나 정부는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에서 98억1000만달러에 달하는 채무를 연내에 전액 상환하게 된다.
키르츠네르 대통령은 2005년 12월 15일 정부청사에서 채무 원리금 전액을상환하겠다고 전격 발표한 바 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는 2001년 12월 디폴트(채무불이행 4년만에 IMF 관리체제를 벗어나게 됐다.
※출처 :
www.barrick.com
아르헨티나 에너지 차관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한국석유개발공사
한국가스신문
골든오일
아르헨티나 광업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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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통상부 남미 자원 협력센터
대한석유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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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2.10
  • 저작시기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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