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과] 대승불교 사상사 중간고사 예상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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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불교학과] 대승불교 사상사 중간고사 예상문제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대승불교란

2. 대승불교의 성립배경

3. 대승불교의 사상적 특질
1) 들어가는 말
2) 대승불교의 사상적 특질
3) 나오는 말

4. 반야사상

5. 주요용어 해설
1) 色卽是空 - 般若經
2) 무분별지
3) 生死卽涅槃 - 무착 및 세친
4) 연기

6. 반야의 실천

본문내용

말할 수 있는 면은 이 절대부정의 행이 각 지들에서 진여를 증득함으로써 각 지들에서 궁경에 이르러 전자의 여래지를 향한 방향성이 소멸되어 일체법이 여실의 상에서 성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방향적인 면은 무방향적인 면과 상즉하여 있음으로써, 끊임없이 그 방향성을 소멸하여 생사에서 열반으로 가는 것은 실은 생사로 돌아오는 것 - 아니, 본래 어디에도 가지 않는 것 - 을 의미한다. 동시에 무방향적인 면은 방향적인 면과 상즉함으로써, 생사나 유의근저가 되는 열반이나 절대무를 오로지 깊고 청정히 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상반된 양면의 상즉을 행사하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의 무분별지이다.
- 생사즉열반은 생사의 경지에서 열반의 경지를 얼마든지 체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있는 것이다.
- 모든진리와 모든 존재는(제법) 인연이 되어 생하는 것이므로(연기) 자기자신만의 불변의 성질을 가지지 않는다(무자성). 그렇기 때문에, 자기자신이 비었기 때문에 공(공)한 것이다.
4) 연기
반야의 분별은 무분별의 분별이며 그 분별은 무분별에서 나온다. 무착과 세친은 대승의 정설을 법계(승의)의 유출이라고 말한다. 즉 승의로부터 세속으로는 연속적이다. 법계는 반드시 응신, 화신이 되어 이타의작용을 나타낸다. 그런데 세속의 말로부터 승의로는 연속되지 않는다. 세속에서 살아가는 불각자가 가르침에 인도되어 사유하여도 그것은 단지 말에 의할 뿐이며, 그 말은 가르침처럼 승의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 말에 의해서 승의(연기P에 도달할 수는 없다. 세속의 말은 승의로 연속되지 못한다. 용수가 연기에서는 희론이 멸한다고 한 것은 이것을 일컫는다. 말만이 아니고 행에 의하여야만 승의(무분별)에 도달할 수 있다. 희론이나 분별에 있어서 모순적(사유할 수 없는 것)인 것이 가르침 속에 있다는 것은, 논리로서 연속되지 않는(통하지 않는) 것이 행에 의해서 비로소 결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6. 반야의 실천
‘실천’이란 ‘이론적사고’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지만, 용수의 실천이라 할 경우, 그 실천의 중심이 되는 것은 육도이다. 육도의 근본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면 용수의 실천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반야, 즉 智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智가 실천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반적으로 知는 이론적이다. 반야는 智인데 어째서 실천적인가. 보통의 실천은 지식이 아닌 것으로서의 실천이지만, 반야는 智로서의 실천이다. 전도된 智(망분별)가 파괴되고 진실한 知가 현성된다. 이 智는 후득지로서는 사유를 행하므로 그런 사유가 성립하는 것도 반야의 현성이라는 것 속에 포함된다. 반야의 智는 실천에 대응되는 것으로서의 이론적인 知가 아닌 동시에, 그러한 이론에 대응하는 것으로서의 실천도 아니다. 반야는 행적인 智이며 지적인 행이다.
그렇다면 행적인 智란 어떤 智인가. 智는 대상적으로 아는 智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작용한다. 智는 모든 물체를 대상으로 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물체를 그 자신으로부터 智한다. 즉, 知적 태도를 깨어버리고 ‘물체’를 그 자신으로부터 智하는 智로 옮겨가는 것이 智인데, 단지 그렇게 옮겨가는 과정뿐만이 아니라 과정이 궁경된것으로서 ‘물체’를 대상적으로 아는 일이 완전히 없어진 곳에서 성립하는 것이 참된 智이다. 이 궁극적인 것까지 포함한 智의 전과정이 반야바라밀이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은 얕은데서 깊은 데로 깊어져 가는 것이다. 실현 자체가 智이며, 실천적, 이론적 구별이 없는 인식이다. 보통의 知, 즉 대상知는 이 반야에 대하여 망분별이라고 불리는 것에 해당된다. 반야는 자아 자체가 허망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智하는 데서 성립하기 시작한다. 자아의 허망성을 智하는 반야가 새로운, 바꿔말해서 참된 주체로서 성립하며, 종래의 자아는 이 새로운 주체에 의해 허망한 자아로서 자각되게 된다. 즉 새로운 자아의 자각내용으로 化하게 됨으로써 허망한 자아는 주체성을 상실한다. 이 주체 자체가 허망으로부터 진실로 전환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적 의미의 실천이다. 이 전환은 허망의 자아, 즉 무엇을 향해 작용하는 주체 혹은 객관에 대한 주관이라 생각되는 것을 부정해가는 것을 내포하고, 이 부정에 卽하여 진실의 주체가 생성해가는 것이다. 자아의 허망성의 근본은 無智(무명)에 의한 것이라서 무지의 부정의로서 작용하는 것이 智이며, 이 智가 진실한 주체의 근본이 된다. 허망한 주체의 근본은 不覺이며, 진실한 주체의 근본은 覺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智인 반야는 行이며 그런 의미에서의 실천이다.
<주체와 세계>
반야바라밀은 자아로서의 허망한 주체가 轉하여 진실한 주체가 성취되는 전환인데, 이것은 세계 속의 어느 한 주체의 고립적인 일로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일로서만 행하여진다. 허망한 자아는 우리들의 주관으로서, 또 우리들 밖에 있는 사물을 우리로부터 독립된 개관으로서 표상하고 있다. 그러므로 허망한 자아를 전사하는 일은 자아가 표상하는 세계(주관과 객관)의 하나하나를 버려가는 일이며, 그것은 동시에 자아가 허망성을 떠나 진실한 자기를 성취하는 일이다. 소위 일체를 공한다는 것은 허망한 자아와 허망한 세계를 아울러 버리는 일이다. 이와같은 세계와 자아, 소분별과 능분별, 분별성과 의타성은 상관적이기 때문에 자아의 사는 동시에 세계의 사이며 세계의 공은 동시에 자아의 공이다. 일체법공이란 세계의 공이라는 말로써 세계와 자아일체의 전환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진실한 자기탄생은 동시에 진실한 세계탄생이다. 허망한 자아는 세계를 그대로 보지 못한다. 반면에 참된자기는 객관과 대립하여 상관하는 주관이 아니고, 주객대립의 장을 초월한 것, 즉 주객으로부터 자재한 것이다. 그 자기에게는 세계가 벌써 객관 즉 나의 자아에 의해 표상된 것, 자아에 대립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그 자신으로서 나타난다. 세계는 단순한 객관이 아니므로 자기도 단순한 주관이 아니다. 이와같은 세계그 자신을 공 또는 진여라고 하며, 물체를 객관이 아닌 그 자신으로, 즉 진여로서 보는 智를 반야바라밀 혹은 무분별지라 한다. 이 진여와 반야를 의타성(주관)이나 분별성(객관)에 대하여 진실성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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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1.05
  • 저작시기2007.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71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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